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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을 극복하는 방법
엇삐

ㅤ​언제나처럼 눅눅하고 뜨거운 계절 속이다. 신체의 구성품이 모두 녹아내리다 사라질 것만 같은 말도 안 되는 열기만 느껴졌다. 세 번의 여름을 지나고 세 번의 만남과 세 번의 이별을 겪으며 자신에겐 감정은 모두 사라지고 감각이라는 불쾌한 잔여물만 남은 듯했다.

이렇게나 여름을 싫어하다 못해 혐오하는 이유는 온전히 A 때문이었다. 진짜 마지막이라고 다짐했는데 본가 주소를 알고 찾아왔던 그 사람. 그날도 그는 아파트 놀이터 시소에 걸터앉아 아르바이트를 끝내고 귀가하는 정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A는 집에 가겠다는 정수를 기어코 붙잡고 주절댔다. 정수는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매일 셔츠에 타이를 매고 출근해야 한다는 그의 반질한 구두 끝만 바라보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더운 바람이 불자 정수가 선물해 주었던 향수 냄새에 생소한 파우더 향이 섞여왔다.

이젠 정말 행동으로 보여주겠으니 믿어달라는 그는 정수를 힘주어 끌어안았으나 김정수는 더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낮에 흘렸던 땀 때문에 조금 젖었다 마른 그의 팔뚝이 불쾌하게 들러붙었다. 슬프지도 않았다. 내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힘껏 눌러 겨우 최소화했던 마음이 다시 부풀며 너덜너덜해짐을 느낀다. 일몰 시각임에도 불구하고 뜨끈한 아스팔트 바닥이 생경하게 일렁거렸다.

선배는 절, 사랑하긴 해요?

바보 같은 질문은 언제나처럼 절대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대신 느리게 그의 팔을 밀어냈다. 축축하게 젖은 제 첫사랑의 얼굴만 한참 쳐다보다가 아무런 말도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려 걸었다.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참으며.

 

그 때부터 김정수는 타인을 믿고 싶지 않아졌다. 그래서 상처받지도 않기로 했다. 여름의 어떤 순간에 놓인 덩어리처럼 그저 가만히 있기로 했다. 매년 돌아올 지긋지긋한 계절이 빨리 지나가기만을 바라며.

 

 

정수씨는 여름이 왜 싫어요?

더럽게 끝난 첫사랑 생각나서요. 본 지 딱 일주일 된 사람에게 건넬 만한 대답은 아닌 것 같아 정수는 그냥요, 하며 얼버무렸다. 그냥이 어딨어요 전 차라리 여름이 좋아요 벗으면 되잖아! 인턴 무리 중 가장 낯가림이 없는 사람이 고개를 좌우로 돌려가며 대화를 주도했고 나머지 셋은 적당히 맞장구치며 지루한 점심시간을 때우는 중이었다.

김정수의 첫사랑이 어찌 되었든 간에 반년은 속절없이 흘렀다. 첫 달은 우느라 잠도 못 잤고 다음 두 달은 허공에 주먹질하며 욕을 퍼부었고 마지막 몇 달은 초연한 채로 멍 때리며 보냈다.

복학한 교정은 아는 사람 하나 없어 허전했고 정수는 자신이 맘 터놓고 말할 친구가 한 명도 없다는 것을 그제야 체감했다. 연애질에 정신 팔려 챙기지 못한 졸업 필수 요건과 졸업시험 어학 점수 취업시장도 갑작스럽게 눈앞에 펼쳐졌다. 한 학기를 헐떡이며 수료 조건을 다 맞췄다. 이젠 정말 취업뿐이었고 정수는 정신없이 구직 사이트를 순회하며 마흔 개가 넘는 이력서를 뿌렸다. 그 중 자신을 불러준 조금 크고 소중한 회사에 인턴으로 출근한 지 일주일 정도 되는 참이었다.

 

부동산업 및 임대업, 금융서비스업이 나열된 업종 목록을 보며 도대체 뭐하는 회사인지 잠깐 의구심을 품었으나 뭐가 됐건 가릴 처지는 전혀 아니었다. 곧 사무실 이전이 있을 예정이라는 회사는, 지하에 체감상 도서관 한 개 분량의 자료를 품고 있었다. 인턴 넷 중 두 명은 몇십 년간 쌓여있던 계약서며 각종 책자를 분류하고 넘버링 및 엑셀 작업 후 쓸데없는 것만 골라 두어야 했고, 나머지 두 명은 회사 설립 후 지금까지 쌓여있던 전표들을 전부 엑셀에 정리하고 편철하는 게 일이었다. 인턴이 아니라 그냥 두 달 동안 뺑이칠 인원이 필요한 게 틀림없었다.

인턴 업무를 인계하러 왔다는 대리님은 남자 여자 붙여두면 정분이라도 날 것으로 생각했던지 남자 둘 여자 둘로 조를 나누었다. 그녀는 정수를 위아래로 스캔하고는, 그래도 이 분이 힘을 잘 쓰실 테니까… 하다 뒷말을 흐렸다. 곁눈질로 쳐다본 책장이 천장까지 닿아 있었다.

정수는 머리가 까맣고 얼굴이 하얀 조금 작은 남자와 함께 책자 정리 업무를 부여받았다. 시끄러운 사람과는 일하고 싶지 않다고 마음속으로 빌었는데 다행히도 남자는 따분한 말을 늘어놓는 사람은 아니었다. 곽지석이랬나. 짧게 자기소개를 하는데 알고 보니 지석은 정수보다는 한 살 어린 같은 학교 컴공과 출신이었다. 업무가 데이터 분석이랑 관련 있는 줄 알았는데 그냥 단순업무네요, 하며 뒷머리를 긁는 지석을 보며 정수는 학교 다니면서 저렇게 잘생긴 사람 본 적이 없는데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첫 출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니 온몸이 뻐근했다. 지하실은 온종일 햇볕도 들지 않았고 구십 년대에 발행된 책자들이며 종이 쪼가리들은 발굴될 때마다 먼지를 날렸다. 구석에 처박힌 스탠드 에어컨은 누렇게 빛이 바래 미지근한 바람만 겨우 내뿜었다. 정수가 서랍에 처박아 두었다 출근을 위해 꺼낸 셔츠는 그새 불어난 몸 때문에 단추가 아슬아슬하게 잠기는 수준이었고 아무렇게나 주워 입은 슬랙스도 마찬가지였다. 습한 지하에서 딱 붙는 옷 입고 책을 나르다 보니 땀이 등줄기를 타고 죽 흐르는 게 느껴졌다. 더위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기분이었다.

…되게 덥네요.

그러게요. 에어컨 좀 바꿔 주시지.

자기소개를 제외하고는 용기 내 건넨 첫 마디였는데 헤헤 웃는 얼굴과 함께 질문보다 더 긴 답이 돌아왔다. 웃느라 약간 드러난 지석의 앞니가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정수는 꽤나 낯을 가리는 편이었고 사람의 감정 표현에 약했다. 특히 타인의 울거나 웃는 얼굴. 첫날이었고 사무실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장소는 더웠으며 지석은 긴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으나 덥다며 투덜대지 않았고 잘 웃었다. 정수는 지석이 나쁜 사람은 절대 아닐 거라고 또 맘대로 단정 지어 버렸다. A에게 발등 찍힌 경험이 다수였는데도 그랬다. 정수는 처음 본 사람도 거짓말도 잘 믿는 편이었다.

씻고 나와 선풍기 앞에서 넋 놓고 있다가 퇴근길에 인턴 중 한 명이 만들어 둔 단체방을 확인했다. 안녕하세요, 잘부탁드립니다, 말풍선과 이모티콘 몇 개가 떠다니는 방을 쳐다보다 정수는 무의식적으로 곽지석 이라는 이름 옆 동그라미를 눌렀다. 프로필 사진은 없고 배경 사진은 까만 밤의 에펠탑. 곽지석 님의 프로필 뮤직 10곡. 적당히 유명한 옛날 한국밴드 노래 두 곡을 빼면 전부 다 정수가 처음 보는 팝송이었다. 개중 맨 위에 있던 노래를 음악 앱에 검색해 재생했다. 어디서 들어본 적이 있는 듯한 여자 보컬의 목소리와 피아노 라인이 말랑말랑했다. 정수는 왼쪽 아래의 친구 추가 버튼을 누를까 하다 관뒀다.

 

함께 일하는 지석과는 손발이 꽤나 잘 맞았다. 점점 더 올라가는 온도에 오후 세 시쯤 되면 둘 다 볼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출근 셋째 날엔 라벨지에 번호를 적던 지석이 먼저 호칭은 뭐로 하냐며 물어왔다.

정수 형님? 선배?

그. 편하신 대로.

그러면 선배로 부를게요. 제가 친형이 있는데 친형 말고는 형님이라 부르는 게 좀 민망해서.

아 그러면 저는. 으음.

선배도 편하신 대로. 이름 부르셔도 되고. 말도 편하게 하십쇼 동문인데.

그. 그래… 지석아.

곽지석이라는 세 글자에서 획이 많은 글자가 빠지니 괜히 친근하게 느껴졌다. 실제로도 지석은 정수에게 꽤나 살갑게 굴었다. 처음엔 뭐 하는 애일까 잠깐 의아해했는데 다른 인턴들을 대하는 걸 보면 본디 사교적인 성격인 것 같기도 했다.

이 주쯤 지나자 업무에 조금 익숙해졌고 지석과도 시답잖은 이야기를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요즘 보는 유튜브 영상이나 좋아하는 노래 이야기를 꺼내니 안 그래도 반짝거리던 지석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다. 지석은 본가가 회사와 가까운 덕에 대부분의 날들을 본가에서 출퇴근 중이었는데 알고 보니 살고 있는 원룸은 정수의 방 주변이라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그럼 오늘은 저도 선배 따라 원룸으로 퇴근해 볼까요? 하핫. 웃는 지석의 말이 장난인 줄 알았는데 매일 쌩하니 길 건너 버스를 타던 지석이 그 날은 정수를 졸졸 따라왔다.

정신 차리고 보니 정수는 지석과 나란히 지하철에 실려가는 채였다. 퇴근 시간 사람을 뱉을 수준으로 꽉 찬 지하철에서 둘은 일렬로 붙은 자세가 되었다. 사무실과 달리 지하철 안은 얼음장 같은 바람을 내뿜었다. 차가운 바람에 팔의 피부가 오돌토돌하게 올라와 예민해졌다. 그 덕에 자신의 맨 팔 윗부분에 닿은 지석의 티셔츠 면과 그 아래의 마른 어깨가 그대로 닿아옴을 느꼈다.

지석은 아까 이야기했던 노래를 들려주겠다며 좁은 와중에도 꿈지럭거리더니 가방 한구석에서 주워낸 에어팟 한쪽을 정수에게 건넸다. 듣자마자 그의 프로필 뮤직에서 보고 찾아들었던 노래임을 알아챘다.

이거 건반 소리가 좋더라고요.

어?

에어팟 끼지 않은 반대쪽 귀로 지석의 말을 다시 들으려 몸을 틀다 배배 꼬인 이상한 자세가 되었다. 건. 반. 소리가. 좋다구요. 좋다고 말하는 지석의 입술이 정수 귀에 닿을 정도로 가깝게 느껴졌다.

아아. 그러게. 좋다.

다섯 정거장을 더 가야 했으나 정수는 노래가 끝나도 에어팟을 굳이 빼지 않았고 지석도 한 짝 돌려달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노래를 이것저것 골라 정수의 귀에 재생시켰다. 지석은, 이건 최근에 들은 노랜데 이것도 좋아요 하며 재생 화면을 보여주었다. 포… 크라잉 아웃 라우드. 느낌표. 정수는 당최 뭐라고 읽는지 모르겠는 가수 이름도 외워보려다 어려워서 집어치우고 제목만 한 번 더 되내었다. 집 가서 한 번 더 들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솔직히 지금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닿아있는 팔뚝이 민망할 정도로 뜨겁게 느껴질 뿐이었다.

둘은 지하철에서 내려 나란히 원룸촌까지 걸었다. 계속 생전 처음 듣는 노래들이 귓가에 재생됐고 골목을 지나다니는 차를 피하느라 둘의 몸이 계속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했으나 별로 불쾌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정수는 귀에서 에어팟을 빼 지석 몰래 반소매 셔츠 끝자락에 닦아 건넸다.

난 이쪽이라… 내일 보자.

네 들어가세요 선배.

지석은 꾸벅 숙이는 대신 손을 들어 팔랑팔랑 인사했다.

정수는 거의 도망치듯 계단을 올라 집에 들어가자마자 방바닥에 철푸덕 엎어졌다. 바닥을 마구 발길질해대다 무릎이 삐끗해 다리를 붙잡고 일 분간 뒹굴었다. 자신도 왜 이러는지 몰랐다.

 

몰랐다고?

 

모르는 척한 거겠지.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 한 달이 소요되었다. 정수는 출근하기 전에도, 퇴근하고도 바보같이 매일 지석의 생각을 했다. 주말엔, 찐득한 책상 위 연식이 오래된 노트북 앞에 지석과 붙어앉아 엑셀 수식을 고민하던 순간을 되짚어 보았다. 반대쪽 구석에서 전표를 정리하던 여자 인턴 두 명의 웃음소리와, 썩어빠진 에어컨이 차라리 죽여달라고 우는 듯 내던 소음과 유독 크게 들리던 지석의 한숨도.

이거 수식 제가 좀 더 해볼게요. 선배는 잠깐 쉬셔도 돼요.

정수는 실제로 피곤했다. 같은 노래를 반복 재생하며 새벽 세 시가 넘도록 핸드폰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지석이 들이밀었던 노래의, 뭐라고 읽는지 모를 가수를 피니어스라고 발음한다는 사실과 그가 유명한 여자 솔로가수의 친오빠라는 새로운 지식까지 획득하곤 겨우 잠이 들었다.

잠 못 잤어요?

…조금. 나 그럼 잠깐 멍 때리고 있을게.

넹.

사무실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지하실의 공기는 습했다. 지석의 타자 소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눈을 느리게 감았다 떴다고 생각하다가 정수리 부근이 차가워 눈을 번쩍 떴다. 왁, 하는 이상한 소리와 함께 눈앞에 연유라떼가 들이밀어졌다. 사왔지롱요. 정수가 미친 듯 졸릴 때만 사 먹는 메뉴였다.

돌이켜 보면 김정수는 매일 밤 단체 메신저 방을 들어가 곽지석 옆의 동그라미를 눌렀다. 그를 친구 목록에 추가하지 않은 건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그러니까 왜.

처음엔 외형이 꽤… A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큼지막한 눈이나 하얀 얼굴 따위가 그러하였으나. A는 발라드만 들었고 옷 입는 게 취미였으며 남들 앞에선 사람 좋은 척 해대는 탓에 평판이 좋았지만 정수에겐 이기적으로 굴었고 종종 정수 몰래 앱으로 다른 사람을 만났다. 반면 지석은 정수가 모르는 외국 밴드 노래를 들었고 첫 주를 제외하면 검정 반소매 티만 돌려 입으며 출근했고 착해 보였고 또. 연애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뭐? 거짓말.

정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불가항력으로 놀랐으나 너처럼 잘생긴 애가, 라는 뒷말만은 겨우 삼켰다. 구라치지마 에타에 공과대 모 수업 들으시는 학우분 너무 잘생겼다는 글 올라오면 댓글로 ㄱㅈㅅ만 10개 달릴 것 같은데 인기가 없었다니 기만이다… 는 말도 꺼낼 뻔했다가 집어넣었다.

진짜예요.

인기 많았을 것 같은데.

인기요? 저 인기 없었어요.

의외다아…

선배는요? 선배도 인기 많았을 것 같은데.

나? 나도 인기 없었어.

거짓말.

진짜.

거짓말.

진짜로.

선배처럼 귀여운 사람이?

실랑이 도중 지석이 툭 던진 말에 순간 말문이 막혔는데 건너편에서 일하던 인턴들이 커피 사러 가실 분? 하잇! 하며 유행하는 릴스를 따라했다. 정수도 과도하게 큰 동작으로 손을 번쩍 들었다. 나, 나도 갈래. 벌떡 일어나기까지 한 탓에 지석의 말에 대꾸할 타이밍을 놓쳤다.

사실 ‘그’ 문장을 듣자마자 요즘 예능에 나오는 개그우먼처럼 쇳소리를 곁들여 소리지를 뻔 했다. 지석아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정수가 생각하기에 지석이 자신보다 큰 남자 취준생을 귀엽다고 할 만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씻고 나와 축축하게 젖은 머리를 한 채, 거울 앞에서 두부에 칼집 넣은 것마냥 평범하게 생긴 얼굴을 이리저리 살폈지만 이유를 찾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너 내가 귀여워? 대체 왜? 라며 물어볼 두꺼운 낯짝도 정수에겐 없었다. 결론은 첫째, 곽지석이라는 애는 뭐든 귀여워할 것이다. 걘 길거리 지나가던 치와와가 싼 똥 보고도 귀엽다고 할 것 같았다. 그러니 둘째, 깊게 생각하지 말고 의미부여 하지도 말자. 정수는 솔직히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너덜해진 마음은 방치한지 오래다. 성인이 된 이후 매 여름을 A와 실랑이하며 보낸 기억밖에 없다. 올해는 정말 조용히 넘기고 싶었다. 그럼 내년도 내후년도 이 거슬리는 계절을 다 괜찮다고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선배 저 번호 좀 주세요. 선배 번호가 없어서.

퇴근 무렵 지석이 불쑥 내민 핸드폰을 보고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계약한 두 달 중 한 달하고도 반 넘게 출근한 상태였다. 정수가 번호를 다 찍자 지석이 갑자기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나 이번 주말에 집 안 가는데 선배랑 밥 먹자고 해도 되나.

엉? 나 주말엔 본가 가는데.

아하. 그렇군요.

너도 본가 가.

…그쵸. 가야죠.

요즘에 한참 안 갔지. 부모님이 서운해 하실 거야.

저희 어머니께서는 저를 자립심 강하게 키우셨습니다. 그렇지만 본가는 가봐야겠죠…, 지석은 더 이상 정수의 대꾸를 바라지 않는 듯 혼자 중얼댔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지석의 아랫입술이 퇴근 내내 미세하게 나와 있었다. 얘 설마 삐졌나… 며칠 전 같이 들었던 노래 이야기를 꺼내봐도 그거 좋죠. 하는 단답만이 돌아왔다. 정수는 귀가 후 오랜만에 떡볶이를 배달시켜 퍼먹다 문득 의아해졌다. 주말에 밥 먹자는 거, 설마 플러팅?

 

책꽂이의 맨 아랫칸부터 작업을 시작하다 보니 어느새 제일 윗 칸의 서류들을 꺼낼 때가 되었다. 키가 좀 더 큰 정수가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먼지 쌓인 사다리를 타고 맨 위 칸의 책을 뽑아내 아래의 지석에게 건넸다. 이상하게 손끝이 계속 스쳤다. 정수는 문득 아래의 지석을 쳐다보았으나 그는 바닥에 책을 쌓아 올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석은 언젠가부터 본가에 가지 않고 매일 정수와 함께 퇴근했다. 지하철에서 지석은 때때로 에어팟 한 쪽을 정수에게 건넸고 그럴 때마다 정수는 갈림길에서 매번 옷자락에 에어팟을 빡빡 닦아 지석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노래를 듣지 않을 때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취업 준비나 엠비티아이나 여행이나 하다못해 원룸촌 배달음식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간이 모자랐다.

저도 여름 별로 안 좋아해요.

어?

선배 여름 싫어한다면서요. 저도 겨울이 더 좋아요.

정수가 예전에 지나가듯 한 말이었는데 기억하는 게 신기했다. 엑셀도 잘 만지더니 기억력도 좋은 것 같았다. 시험기간 벼락치기 암기나 겨우 해내고 뒤돌아서 다 까먹는 자신과는 다른 부류인 듯싶다. 똑똑하구나.

어떻게 그런 걸 기억해?

제가 좀 기억력이 좋아요.

부럽다아.

제법 친해졌다고 으쓱대는 게 귀여워서 정수는 자신도 모르게 지석의 귀 부근을 손등으로 쓸다가 화들짝 놀랐다. 아, 미안. 버릇이… 아 아뇨 괜찮습니다. 지석은 약간 얼빠진 얼굴로 삐걱대다 왼쪽 얼굴을 손으로 마구 쓸어내렸다. 마른 손가락 사이 귓바퀴가 빨갰다.

정수는,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원룸촌으로 올라가는 지석을 곁눈질로 살폈다. 맞을까 하는 의심과 아니길 바라는 마음이 공존했고 그 사이에 설마 하는 기대감까지 스멀스멀 피었다. 한평생을 눈치 없다는 타박 들으며 살아왔음에도… 김정수는 머리통에 떠오르는 물음표를 누르느라 힘이 들었다.

 

출근 마지막 주에 인턴 하나가, 그래도 두 달 동안 고생했는데 다 같이 저녁이라도 먹지 않겠느냐며 제안했다. 회사 앞 직장인들 사이에서 삼겹살을 굽고 있자니 괜히 그들처럼 진짜 직장인이 된 것 같은 생각에 기분이 약간 들떴다. 그런 구닥다리 전표는 다신 보고 싶지 않다며 진절머리를 내는 두 명 사이에서 정수는 저희 너무 더운데 고생했다며 맞장구를 쳤고 지석은 계속 소주를 목구멍에 들이부었다.

지석아. 곽지석. 그만 먹어.

저분 실연 당하셨어요? 왜 저래.

그만 드세요 지석니임.

인턴 세 명이 돌아가면서 말렸는데도 지석은 결국 취했다. 원래 하얗다 못해 투명한 애가 새빨개져선 큼지막한 눈이 풀렸다. 2차 호프집에서 지석은 내내 엎어져 자다 귀가할 때쯤에서야 정수가 탈탈 털어 깨웠다. 집 가자 곽지석! 지석은 비몽사몽한 상태였다.

5트 끝에 잡아탄 택시는 여기부턴 경사가 너무 심해 못 올라간다며 둘을 길바닥에 뱉어냈다. 택시 기사님이 손님 하나라도 더 받으시려나 싶어 거짓말인 걸 알면서도 대충 카드를 들이밀었다. 술도 깨울 겸 잠깐 걸으면 좋겠지 싶었는데 땅에 발을 댄 지 5분 만에 정수는 우겨서라도 지석의 원룸 앞에서 내려달라고 할 걸 후회했다. 지석은 갓 태어난 새끼 기린처럼 발을 떼었고 정수는 그 꼴이 도저히 불안하여 결국 지석을 억지로 업었다.

내려.

뭘 내려.

내려어.

이거 완전 1호선 태극기부대가 따로 없네 싶었지만 정수는 무시하기로 결심하고 묵묵히 오르막을 걸었다. 지석이 한숨처럼 내뱉는 숨이 목덜미를 간지럽혔다. 자신보다 체온이 높은 지석을 놓아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몇 분 조용하던 지석이 툭 말을 던진다.

선배는 눈치가 없어요?

뭐?

야 김정수.

야 김정수?

순간 열 받아서 업고 있던 지석을 거의 내팽개치듯 놓았다. 으억 소리를 냈으나 타격받지 않은 듯 지석은 기다렸다는 듯 길바닥에 아예 자리를 펴고 철푸덕 앉아버린다.

야아 여기 앉으면 어떡해. 더러워. 일어나 빨리 집에 가자.

내가 강아지예요?

정수는 대꾸하지 않고 지석의 옆구리 사이로 손을 넣어 그를 일으키려 애썼다. 집에 가야지 벌써 열두 시가 넘었어…, 택시에서 내린 게 열한 시 정도였는데 미쳤지 미쳤어. 정수가 힘을 주자 지석이 질질 끌려왔다. 밥을 안 먹고 다니는지 엄청 가벼웠다. 오십 센티 정도 끌다가 지석의 티셔츠가 말려 올라가 허연 배가 드러나길래 정수는 허겁지겁 다시 손을 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석은 배를 드러낸 채 대자로 드러눕는다.

야 김정수!

너 아까부터 계속 야자를 살살… 정수는 약간 열받아 있는 상태였으나 지석은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선배 진짜 바보지?

지석이 무슨 말을 하나 들어보자 싶어 정수도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내가 왜 바본데.

선배는. 내가 그렇게.

응응.

내가 그렇게! …들이댔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김정수는, 부어라 마셔라 퍼붓는 여자 인턴들 사이에서 딱 한 잔 얻어먹은 소맥의 취기가 갑자기 올라 얼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 들이댄 거였다고? 지석이 빤하게 눈을 맞춰오자 순간 말문이 막혔다. 정수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사이 지석이 찌푸린 채 주절댔다.

내가. 밥도 먼저 먹자고 하고. 번호도 달라고 하고. 본가도 안 가고 맨날 집에 같이 가고. 맨날 선배랑만 얘기하고.

…그랬구나.

선배 눈치 없다는 얘기 많이 듣죠?

좀 그렇긴 한데. 말끝을 흐리자 지석이 하하 웃었다. 말을 더 붙이진 않았으나 그럴 줄 알았다는 웃음 같았다. 일그러져 있는 지석의 미간을 손끝으로 살살 펴자 신기하게도 지석의 얼굴이 편해졌다…가 결국 코난 마취총이라도 맞은 듯 온몸에 힘을 쭉 빼더니 결국 정수의 품에 푹 기댔다. 곧 지석의 숨소리가 규칙적으로 변했다. 딱 십 분만 이대로 있어야겠다고 정수는 생각했고 동시에 내일 아침 다시 얘기해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근 두 달간 곽지석 생각을 맨날 했다고. A의 생각을 하지 않게 된 지가 딱 두 달이었다. 곽지석이 들려준 노래와 풀어낸 수식과 건네준 커피 덕분에. 선배라는 호칭은 정수에겐 지긋지긋해야 정상인데 곽지석이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걸 들으니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지석이 언젠가 퇴근길에 알쓸신잡마냥 해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폭염주의보는 체감온도 삼십 삼도 이상인 상태가 이틀 이상 이어질 때 발령된다고 했다. 그땐 그저 신기하다고 넘겼던 말이었는데. 생각해 보면 주의보가 하루걸러 하루 발령되는 날에 더운 사무실에서 먼지를 한 트럭 들이마셔도 크게 힘들다고 느끼지 못했다. 스치는 손끝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온 신경을 곤두세웠던 탓이려나. 감정 같은 건 다 써버린 줄로 착각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알겠다. 멈추어 있던 여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이유를. 그래서 정수는 받아들이기로 한다.

더는 계절 탓을 하지 않겠다. 누군가를 탓하고 미워하는 대신… 정수는 지석을 작게 흔들어 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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