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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

ㅤ서울 월세 너무 비싸다. 택배 주문이 주인지라 굳이 학교 근처에 작업실 얻을 필요는 없었다. 학창시절을 보냈던 곳으로 돌아갔다. 작업실과 원룸을 따로 구해도 부담 되지 않는 나의 동네로. 남의 땅에서 허덕이면서 개고생했던 날들이 꿈처럼 느껴졌다. 하기사 지석에게 서울은 거대한 실기실 이상의 의미는 아니었다. 결국 아무 것도 바뀌지 않은 모습으로 등받이 없는 의자에 걸터 앉아있다.

 

ㅤ이유는 모르겠다만 학교 다닐 때 인기는 좀 있었기에 동기 선후배들이 여기까지 찾아오기도 했다. 그냥 택배로 시켜도 되는데에. 지석은 사람 좋게 웃으며 캡슐머신으로 에스프레소 샷을 내린다. 작업실 어떻게 꾸며놨나 좀 보려고 왔지. 다들 그렇게나 친한 척 한다. 그 사람들에게 들려줄 건 아이스 아메리카노밖에 없었다. 그래서 잘 마시지도 않는 커피 머신을 산 거다.

 

ㅤ사람들이 돌아가면 혼자서 후배의 권유에 만들었던 인스타 계정에 작업물들을 올린다. 다른 쪽으로는 미감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는 했는데 손으로 만드는 것만은 요즘 힙의 범주에 들어맞는 듯했다. 운 좋은 일이다. 치킨집이나 차리게 된다는 저주를 비껴서 전공으로 벌어먹고 살고 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 뒤늦게 입시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던 시절과 달라진 게 많기는 했다. 뽀얬던 손에는 굳은살이 배겼고 마론인형 같던 얼굴은 이리저리 갈라지고 버석해졌다. 늘 투블럭과 일자 앞머리를 유지하던 부지런함도 사라졌다. 제멋대로 자란 머리는 이제 뒷목을 다 덮는다. 사람이 이렇게 빠르게 시들 수도 있구나. 거울을 볼 때마다 낯설었다. 나조차도 그런데, 하물며 다른 사람에겐 더한 일일 거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곽지석이 인스타 디엠으로 친절 떠는 이런 상황을.

 

 

ㅤ@jsuuuuu.tol

ㅤ [안녕하세요...! 이 글 보고 작업 문의 드립니다. 혹시 아직 도자기 클래스 받으시나요..?]

ㅤ [안녕하세요 지금은 클래스는 받지 않고 있습니다]

ㅤ [아......ㅜㅜ 그럼 혹시 언제쯤 신청 가능할까요?]

ㅤ [다다음달 일정은 미정이긴 합니다만... 따로 원하시는 과정이 있으실까요?]

 

ㅤjsuuuuu.tol는 얼마 안 가 지석의 게시물 중 하나를 공유했다. 원형 접시 위에 삼색 고양이를 장식한 판매작이었다. 저희 고양이를 이렇게 만들고 싶어서요. 그런데 접시 빼고 고양이만요! 애절하게 부탁한 것 치고는 간단한 주문이었다. 이런 건 그냥 다른 데 가서 만들어도 되지 않나. 그냥 오브제 같은 걸론 기성품도 많을텐데. 대충 그런 거 사시면 안 되냐고 묻고 싶었으나 참았다. 해도 될 말인지 제 인성이 바닥난 것인지 분간할 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 무지개 다리 건넌 지 얼마 안 되어가지구요... 말 안 하길 천만 다행이다. 아 네 그러면 여기로 예약금 선입금 해 주시고요 작업실 주소는 여기고 반려묘 사진 미리 보내주시면 디자인에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주문 아니고 클래스 예약 맞으시죠... 그렇게 건조하고 형식적인 예약 멘트를 전송했다.

 

ㅤ예약금을 즉시 입금한 jsuuuuu.tol이 넵넵! 김정수로 입금했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닷.! 이라고 답장해왔다. 지석은 대충 하트를 누르고 디엠을 끝냈다.

 

 

ㅤ**

 

 

ㅤ두 달 뒤의 예약일이 됐다. 클래스는 받은 지가 오래돼서 간만에 작업실 청소를 해야 했다. 아 그냥 거절할거어얼. 아침 9시에 맞춰 놓은 알람을 듣고 일어난 지석이 절규했다. 그래도 일에 있어서는 나름 성실한 편이었다. 결국 무거운 몸을 이끌고 작업실 바닥을 빗자루로 쓸고 물걸레 청소포로 닦기까지 완료했다. 클래스 손님이 오기 전까지 한 달에 한 번 스마트스토어에 판매하는 키링의 자재를 빚었다. 이렇게 손가락으로 꼼질거리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지석의 손끝으로 예쁘지도 않은 것들이 투박하게 빚어졌다.

 

ㅤ사람들은 이런 걸 왜 좋아할까. 나 같은 사람이 마음대로 만든 게 1분도 안 되어 완판되는 현상이 기묘하다. 비싼 등록금 내가면서 미대를 졸업했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아파트 한 채보다 캔버스에 물감 떡칠해놓은 게 더 높은 가치를 갖는다는 걸 아직도 이해할 수 없다. 실리보다는 감각하는 게 중요한 세상이었다. 그걸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이해하는 척 사람들에게 팔아넘기는 짓은 결국 사기 아닌가. 누군가 지석을 찾아와서 사상검증 인터뷰 할 일은 없지만 매일 한켠으로는 두려워했다. 나는 예술가가 아니다. 그냥 뭉개고 깎아내는 데 재능 있는 기계일 뿐이다.

 

ㅤ이렇게 같은 걸 하염없이 만들 때 생각이 많아진다. 여느 때처럼 전 여자친구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오빠. 부정해봤자 오빠는 태생이 예술충이야. 존나 정신병자잖아. 답도 없는 생각하지 말고 그냥 받아들이고 살아. 걔는 결국 정신병자 예술충을 차 버리고 4학년 2학기에 대기업에 입사했다고 했다. 삶은 만들어가는 게 아니라 운명에 순응하는 과정인 것 같다. 걔도 나도 이렇게 어울리는 자리 잘 찾아간 거 보면. 숱한 대외활동 경력과 특유의 밝은 성격으로 말을 참 잘 하던 걔는 지석의 살을 아주 깔끔하게 발라놨다. 생각 좀 그만 하고 그냥 하라고. 네 머리로 생각해봤자 해결되는 거 없다고. 나름 냉혈한이라는 타이틀 달고 살던 곽지석은 그 때 처음으로 상처 받아서 울어버렸다. 하하하하 또 생각해버렸다. 걔 말 인정하기 싫은데 진짜 정신병자처럼. 아 이 사람 언제 와! 간편하고 마음 편하게 애꿎은 사람을 탓하면서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ㅤ"......아............죄송합니다."

 

ㅤ뒤이어 현관문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말했다.

 

ㅤ씨발!

 

ㅤ왔으면 말을 하시지. 집중하면 소리를 못 듣는 편이라서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경직돼서 서 있는 jsuuu...어쩌고씨가 눈을 굴렸다. 지석은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아 오셨어요? 라고 물었다. 들어오시라며 손짓하고는 의자를 가져오기 위해 안쪽으로 향했다. 등을 돌리자마자 눈을 질끈 감았다. 들었나. 들었겠지. 개씨발. 나름 SNS 계정 관리하면서 먹고 살고 있는 터라서 더 민망했다. 입술을 꽉 깨문 지석이 의자를 가져오자 어쩔 줄 몰라하던 손님이 꾸벅 인사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ㅤ"하하. 제가 집중하면 소리를 못 들어서. 그 고. 고양이 만드시는 거 맞죠?"

ㅤ"아......괜찮아요. 네 맞아요."

 

ㅤ태연한 척 휴대폰으로 제 인스타 계정을 켰으나 그때까지도 심장은 벌렁벌렁거렸다. 작업할 때는 친구들이 놀릴 정도로 똥폼 잡는 게 습관이었는데 속절없이 말투가 무너졌다. 고양이 이렇게도 만들 수도 있고요. 어 이렇게 만드는 것도 예쁘고요. 아 고양이가 무슨 색이신지... 아 맞다 사진 보내주셨었구나 저 잠깐만요 확인 좀 할게요. 손님이 대답할 새도 없이 말이 이어졌다. 나 이딴식으로 하면서 돈 받아도 되나. 그러나 다행히도 그렇게까지 깐깐한 손님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맹한 눈으로 멍때리면서 오오 좋아요 따위의 기계적인 리액션이나 덧붙여온다.

 

ㅤ손님이 보내준 사진은 대부분 흰색에 작은 얼룩이 몇 개 있는 고양이였다. 따라서 흰 색의 도자기를 먼저 빚기 시작했다. 제가 중간중간 모양 잡는 거 도와드릴텐데 괜찮으세요? 네! 우렁찬 대답에 하얗고 뭉툭한 손등을 제 손으로 덮었다. 손재주가 좋은 손님은 아닌 것 같다. 모양 잡는 데 계속 애를 먹어서 지석이 중간중간 터치를 넣었다.

 

ㅤ"야아옹."

ㅤ"?"

 

ㅤ굵직한 남자 목소리로 고양이 울음소리 뱉는 것을 들었지만 잘못 들은거라 생각하며 애써 무시했다.

 

ㅤ소품 만드는 건 어려운 작업은 아니라 금방 모양이 잡혔다. 이제 얼룩과 눈코입, 징그럽지 않을 만큼 털결을 살려야 한다. 지석이 작은 칼을 가져왔다. 이걸로 얼굴 모양 잡을 거예요. 일단 고양이는 코가 이렇게 튀어나와있으니까요. 여길 이렇게... 손짓 몇 번에 하얀 덩어리가 고양이로 변했다. 와아. 남자가 감탄하며 도자기를 받아들었다. 지석이 알려주는 절차에 따라 작업을 거치니 점점 고양이 형체를 갖추게 되었다.

 

ㅤ"우와. 진짜 우리 톨이 같다."

ㅤ"이름이 톨이인가요?"

ㅤ"네에. 너무 귀여워요. 톨이가 금방이라도 정수 형~ 하고 달려올 것 같아요."

ㅤ"......"

 

ㅤ톨이라는 이름이 익숙해서 한 번 말 붙였다가 봉변이었다. 지석이 일대일 클래스를 주로 받지 않는 이유가 바로 이런 거다. 생긴 거랑 다르게 낯가리고 처음 보는 사람한테 넉살 좋게 멘트 칠 줄도 모른다. 만들 줄만 알지 장사꾼으로서의 면모는 바닥이었다. 그러나 손님은 그런 건 신경도 안 쓰는 것처럼 혼자서 뭐라고 계속 지껄였다. 사실 꼭 사장님한테 맡기고 싶었던 게... 이 털 살리는 게 너무 마음에 들었거든요. 우리 톨이는 먼지처럼 털밖에 안 보이는 애였어서... 문의 드리길 잘 했어요. 김정수 진짜 기특하다. 예약 받아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ㅤ"네......"

 

ㅤ그 말에 그런 대답밖에 못 내놓았을 때는 정말로 통증을 느꼈다. 아... 이제부터 클래스는 그냥 안 받아야겠다.

 

ㅤ손님은 사진과 도자기를 번갈아보며 열심히도 작품을 만들었다. 예상했던 시간을 꽉 채워서 수업이 끝났다. 만든 도자기는 가마에 굽고 유약을 바르는 과정을 거친 뒤 자택으로 배송된다. 손을 씻고 돌아온 손님에게 포스트잇 한 장을 건넸다. 배송 정보를 받기 위해서다. 하지만 지석은 아까 일 때문인지 정신이 없다. 아직 정리가 덜 된 키링 부자재들을 한쪽에 넣어두기 시작했다. 문 앞에서의 찌질한 모습처럼, 손님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저기... 정신 없이 작업실을 정리하는 지석에게 애절하게 외치다가 포기한 그는 볼펜으로 뭔갈 끄적였다.

 

ㅤ"다 적으셨어요?"

ㅤ"아 네!"

 

 

가온님 도자기 원데이 클래스!

저희 톨이를 만들었어요♡

김정수, 고생했다 !

 

 

ㅤ"......"

ㅤ"......?"

ㅤ"택배 받으실 주소 적으라고 드린 건데요."

ㅤ"아."

 

ㅤ아 죄송해요. 제가 못 들어서. 아니 애초에 제가 말씀을 안 드렸구나...... 죄송해요. 다시 드릴게요. 잔뜩 머쓱해진 두 사람이 뚝딱거리며 움직였다. 다시 자리에 앉은 정수가 고개를 푹 숙이고 다시 펜을 들었다. 포스트잇에 꾹꾹 주소를 눌러 적는다. 네 감사합니다아. 배송하기 전날 쯤에 연락 드릴 거예요. 네! 고생하셨습니다! 수업이 다 끝나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난 손님이 180센티미터 정도 되는 멀끔한 남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루 묻지 않게 한쪽에 뒀던 크로스백을 꺼내주자 예의 바르게 받아드는 손님. 그러다 결국 결심한다. 내내 궁금했던 거. 이거 안 물어보면 계속 궁금할 것 같다.

 

ㅤ"그런데요."

ㅤ"네?"

ㅤ"...도대체 김정수가 누군가요?"

 

ㅤ그러자 남자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린다. 무슨 당연한 걸 묻냐는 듯 더 황당해 보이는 얼굴이다.

 

ㅤ"네? 전데요?"

ㅤ"아"

 

ㅤ아. 아아아.

ㅤ아......예.

ㅤ지석이 떨떠름하게 대답하든 말든 저쪽은 알아채지도 못한 것 같다. 너무 감사합니다! 다음에 기회 되면 또 오겠습니다! 좋은 저녁 되세요! 씩씩하게 떠난 손님이 닫고 간 현관문을 지석이 얼빠져서 본다. 귀여움이랑은 거리가 멀어 보이셔서 들으면서도 설마설마 했는데.

 

ㅤ3인칭?

 

 

ㅤ **

 

 

ㅤ2주 정도 지난 뒤에 정수에게 다시 디엠을 보냈다. 고객님 작품 다 제작 됐고요 내일 아침 우체국 택배로 발송할 예정입니다. 배송정보 변경되신 것 있으시면 말씀해주세요. 그러자 반나절 정도 뒤에 답장이 왔다. 아! 저 혹시 직접 찾으러 가도 될까요?! 택배 포장까지 다 해놨는데 굳이? 싶었는데 안 된다고 할 이유는 없어서 그러시라고 답장했다. 그리고 곧 키링 만들기에 몰두했다.

 

ㅤ그 다음 날 아침 정수는 한손에 의문의 상자를 들고 방문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만들었던 거 찾으러 왔어요. 지석에게 안성맞춤인 작업실이 정수가 들어서자마자 비좁게 느껴진다. 아, 네. 들고 가기 편하게 다시 포장해놓은 도자기를 꺼내왔다. 투명한 봉투를 받아든 정수의 눈썹이 팔자로 축 늘어졌다. 슬픈 건 아니고 약간 감격한 듯한 얼굴이었다. 아아아. 감사합니다. 예에. 또 사회성 없이 대충 웃어보인 지석이 괜히 여기저기 놓인 집기들을 만진다. 받았으면 이제 썩 꺼지세요... 잘 보이지도 않는 봉투 속을 들여다보던 정수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탄식한다. 그리곤 올 때부터 쥐고 있던 상자를 눈 앞에 내민다.

 

ㅤ"사장님 선물이에요. 김정수 최애 디저트."

ㅤ"네? 아... 감사합니다."

ㅤ"톨이 예쁘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ㅤ"아 아닙니다. ㅎㅎ"

ㅤ"혹시 또 예약 될까요?"

 

ㅤ가라고. 가라고. 속으로 뇌까리다가 절로 네? 하고 대답해버렸다. 입을 벌린 채 웃고 있는 얼굴이 쓸데없이 해맑다. 거절하기 미안하게. 죄송하지만 제가 사회성이 바닥나서 더 이상은 안 되겠습니다. 이런 건 어떤 말로 순화될까. 이러려고 여기까지 직접 행차하셨나. 괜히 고민하는 척, 곤란한 척하면서 손으로 턱과 뺨을 쓸었다. 아 그게요... 보기보다 눈치가 빠른 건지 지석이 너무 읽히도록 행동한 건지. 거절할 분위기라는 걸 알아채버린 듯하다. 아니 널린 게 공방인데 다른 데로 가면 되잖아? 우물쭈물하는 게 다 보이도록 입술을 물던 정수가 무슨 비장의 카드라도 내미는 것처럼 외친다. OO대학교!

 

ㅤ"네?"

ㅤ"OO대학교 나오셨죠 조소과?"

ㅤ"네 맞긴 한데"

ㅤ"그럼 저 모르세요?"

ㅤ"...아?"

 

ㅤ님 모르냐고요? 네 모르겠는데. 하지만 위기 상황인 듯하여 한꼬집의 사회성을 발휘했다. 아아아.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 깍지 낀 손으로 머리통을 받쳤다. 마치 기억이 날랑말랑 한다는 듯. 그 말을 듣고 보니까 누군지 알겠다는 듯. 그러자 의기양양해진 정수가 말했다. 제 여동생이 OO대학교 나왔거든요. 아니 씨발 그러면 님을 어떻게 압니까? 황당해서 표정이 일그러진다. 이상하다. 여동생이 아는 사람이라고 추천해준 거거든요. 손님 동생이 누군데요. 정희요! 김정희. 김정희?

 

ㅤ그렇게 2년 전에서 멈춰 있는 카톡방이 활성화된다. 정희야 잘 지내니. 왜 잘 지내니. 우리 연은 그 때 끝난 거 아니었니. 그러나 사회인의 탈을 쓰고 차마 뒤의 말까지는 보내지 못한다. 몇 분 안 지나서 정희에게서 답장이 왔다.

 

ㅤ[어 오빠 ㅎㅇ~]

 

 

ㅤ**

 

 

ㅤ운명처럼 정희가 지석의 전여친이었다거나 하는 스토리는 아니다. 그러나 정희는 지석의 빠그라진 연애에 크게 일조한 바 있다. 김정희는 잠깐 세 달 정도 디저트 카페 알바를 할 때 알게 된 한 살 아래의 여자애다. 당시 카페의 에이스였던 정희는 막 들어온 지석에게 샷 내리는 법과 블랜더 돌리는 법을 친절하게 알려줬다. 귀여운 단발과 동그란 볼이 순진해보였다. 그러나 지역 상품권을 현금으로 바꿔달라며 난동 부리는 중년 남성을 돌려보내고는 "한남충 존나 지랄하네" 혼잣말하는 듬직한 성격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나만큼 음침한 애군.

 

ㅤ정희와는 일하는 타임이 자주 겹쳐서 대화하는 시간이 많았고 자연스레 친해졌다. 그러다 어느 날은 동그란 눈으로 지석을 빤히 올려다 보는 것이다. 그리고 곽지석의 인생을 완전히 바꿔놓은 한마디를 했다. 오빠 내 친구 소개 받을래? 그 친구가 바로 영원히 귓가를 맴돌며 너는 정신병자라고 호통 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다.

 

ㅤ그러니까 엄밀히 따지자면 정희는 지석과 불행을 이어놓은 주선자인 것이다. 지석이 여자친구의 자취방에서 풀리오 어깨 마사지기에 헤드샷 당해 쌍코피를 쏟고 이별하면서 자연스레 정희와도 연락이 끊겼다. 딱히 연락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물론 잠깐 앙심 품기도 했다. 나한테 그런 미친 애를 소개해줘? 하지만 여자친구에 대한 악감정을 정리하면서 정희에 대한 기억도 무뎌졌다. 그런 김정희... 기억하는 것보다 더 뻔뻔하다.

 

ㅤ[아]

ㅤ[고양이 보내고 너무 힘들어하길래]

ㅤ[내가 추천해줫는데]

 

ㅤ톨이의 이름이 익숙했던 이유를 그제서야 알았다. 정희가 손님 없을 때마다 자랑하곤 하던 그 흰색 고양이. 정수의 손에 들려있는 도자기 고양이랑 똑같다. 그래 뭐가 어찌 됐건 내 알바는 아니다. 네가 너네 오빠한테 나에 대해 알리건 말건. 물론 내 스케줄에 지장 없는 선에서!!!!!! 지인 추천이라는 마패 들이밀면서 요구해대는 걸 결국 거절하지 못했다. 사회성 부족으로 이제 클래스 예약은 안 받으니까 일정은 텅텅 비어있긴 했다. 그 덕에 당장 다음 주에 정수의 두 번째 도자기 클래스 예약이 잡혔다. 읽씹하기로 결정하고 카톡을 꺼버렸다. 몇 분 뒤에 정희에게서 카톡 몇 통이 더 왔다.

 

ㅤ[톨이 만들었다며]

ㅤ[둘이 친해져ㅋㅋㅋㅋ]

ㅤ[걔 친구 많아]

 

ㅤ아 친구가 많으시구나. 그것 참 놀랄 노자로다. 이번엔 안읽씹하기로 하고 핸드폰을 던져버렸다. 클래스고 뭐고 이번이 마지막이다. 나는 방구석에서 혼자 흙 깎아서 파는 게 적성에 맞아... 벌써부터 다음 주가 두렵다.

 

 

ㅤ**

 

 

ㅤ노쇼하시길. 제발 나를 잊으셨길. 이라는 바람이 무색해지게 예약보다 한 시간이나 더 일찍 도착한 정수를 억지로 반겼다. 이렇게 빨리 왔다고...? 저번에도 이랬다면 씨발 씨발 하면서 키링 만드는 것도 다 봤을 것이다. 죽고만 싶다. 클래스 진행자가 똥 씹고 있는 건 아는지 모르는지 너무 기대된다고 이빨 터는 정수의 앞에 일회용 비닐을 깔았다. 그러고 보니까 뭘 만들 건지 묻지도 않았다. 자료 가져오셨냐 묻자 약간 발그레한 얼굴로 대답하는 정수다.

 

ㅤ"오늘은 저를 만드려고요..."

 

ㅤ아... 아. 네. 그러니까 본인을? 네 저번에 만든 톨이랑 같이 두고 싶어서. 네. 부끄러워하는 게 열받아서 그냥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준비해둔 재료를 들고 왔다. 저번에 고양이는 주먹만하게 만들더니 본인 피규어는 무슨 손가락 마디만하게 만들고 있다. 그 작은 걸 빚겠다고 드넓은 어깨와 건장한 팔뚝 꾸역꾸역 접는 걸 두고 부엌 쪽으로 향했다. 커피 드릴까요? 아메리카노랑 연한 아메리카노 있어요. ...우와. 그럼 저는 연하게 부탁드릴게요. 네. 세상에서 제일 성의 없는 그런 클래스 시간이었다.

 

ㅤ그러나 인간 말종에게도 양심은 있었다. 클래스보다는 장소와 재료 제공에 가까웠다. 이딴 식으로 해놓고 돈 받아먹을 생각할 정도로 장사치는 아니었다. 정희 오빠분이신데 이번엔 그냥 해드릴게요. 다 마르면 저번에 받은 주소로 보내드릴게요. 크기도 작고 이목구비가 다 일그러진 기괴한 것을 두고 말했다. 정수의 눈이 크게 뜨였다. 아니에요 무슨...! 요즘 제일 핫한 작가님이신데 어떻게 그래요. 지석은 그 말에 또 기분이 약간 녹는 단순한 놈이다.

 

ㅤ"원래 친구들한테 그냥 만들어주고 해요. 제 성의라고 생각하고 받아주세요."

ㅤ"아... 그래도."

 

ㅤ그건 너무 죄송한데. 말끝 늘어지는 게 어째 불안하다. 제가 밥이라도 살게요 그럼. 예상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은 대답에 식은땀이 다 흐른다. 지석이 손사레쳤다. 아 괜찮아요. 정수라서 싫다기보다는 이제 누구랑 같이 밥 먹을 힘 같은 게 안 남아있어서 그런다. 정수가 눈을 순하게 뜨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 근처에 여기 맛있다는데 가보셨어요? 제가 밥 살게요 저녁 먹어요. 아......

 

ㅤ아...

ㅤ아~~~~~~~~~~~~~~~~~~~~~~~~~~~~~~~~~

 

ㅤ오늘 일정: 클래스 대충 해치우고 집에 누워서 게임하다가 일찍 자기

가 완전히 어그러졌다. 여기에서 십몇년을 살았는데도 몰랐던 맛집을 찾아온 정수가 예의 바르게 냅킨과 수저를 찹찹 놓았다. 메뉴는 재미 없는 부대찌개. 서울 촌놈들 놀러올 때마다 먹었더니 피부가 후랑크햄이 된 것 같다. 다행히도 정수가 잘 먹는 편인 것 같았다. 많이 드시라며 앞접시에 건더기 팍팍 몰아줬다. 약간 감동한 듯한 얼굴로 웃는 걸 보고 뻘쭘하게 물이나 마셨다. 아아아 집에 가고 싶다.

 

ㅤ아무리 그래도 성격이 이 지경은 아니었는데 언제부터 이렇게 됐을까. 걸쭉하게 졸아드는 부대찌개 냄비를 보면서 또 생각에 빠져들었다. 지겨워도 어쩔 수 없다. 정신병자 예술충 특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걔랑 사귀면서 가스라이팅 당한 뒤부터 모든 게 망가진 것 같았다. 그 끔찍할 정도로 제정신이던 경영학도 녀석. 지석은 이제 그런 멀쩡한 놈들 혐오증이 생겼다. 다리를 달달 떨면서 반 넘게 남은 공깃밥을 내려다봤다. 역시 의정부 부대찌개 맛이 다르다며 허겁지겁 먹고 있는 정수에게 물었다.

 

ㅤ"근데 정수씨는 전공이 뭐예요?"

ㅤ"저 보컬이에요. 지금 학교 다녀요."

 

ㅤ학교 늦게 들어가서요. 말 한 마디마다 햄 한 조각씩 집어먹는 펠리컨이 대답했다. 와 보컬? 진짜 예상도 못했다... 그리고 다행히 경영학과 졸업생은 아니시구나. 그 사실에 웃기게도 호감도가 상승한다. 주변이 미대생 밭인데 음대생은 처음 봐서 호기심이 일었다. 내내 핸드폰만 보던 시선을 그제서야 정수의 앞접시에 처박고 물었다. 음대에도 미친놈들 많죠? 학교 다니는 거 어때요?

 

ㅤ"힘들죠... 이상한 애들도 진짜 많죠."

ㅤ"그쵸. 어딜가나 다 똑같구나."

ㅤ"네...... 진짜 다 죽여버리고 싶죠."

 

ㅤ......?

 

ㅤ그렇게까지? 지석이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자 그제서야 우물거리던 입을 가리는 손이 가증스럽다. 아.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바르게 생기셔서 그런 말은 할 줄 모르는 줄 알았는데 의외다. 네 뭐 솔직해서 보기 좋네요. 끝까지 진심은 아니었다는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 지석은 정수가 자신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마음이 풀렸다. 또라이 같이 3인칭 쓰고 고양이 울음소리 냈을 뿐이지 그냥 평범한 사람이구만. 정희 뒷담도 좀 까고 음대는 어떤지 미대는 또 어떤지 얘기하다 보니까 식당 문 닫을 시간이 다 됐다. 술 한 병 없이 얘기를 얼마나 한 건지 모르겠다. 첫인상과는 다르게 같이 있다 보니까 또 주파수가 잘 맞았다. 특별한 얘기 하는 건 아니지만 관심사와 환경이 비슷하니 말이 술술 나오는 그런 사람이 있지 않은가. 아쉬운대로 먹은 킨사이다 세 병을 보던 정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석씨 괜찮으면 다음에 술 마실래요? 식당 들어오기 전과 마음이 달라진 지석은 흔쾌히 승낙했다.

 

ㅤ"네 그래요 뭐. 도자기 다 되면 그 때 어때요?"

 

ㅤ그땐 참 그래도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었나. 아무튼 지석은 아가리 경솔하게 놀린 것을 두고두고 후회한다.

 

 

ㅤ**

 

 

ㅤ정수가 만든 <작품명: 김정수>는 너무 작은 크기라서 금방 완성됐다. 인스타 디엠 대신에 저번에 교환한 카톡으로 도자기 사진을 찍어 보냈다. 정수씨 도자기 완성됐어요 시간 되실 때 찾아가세요. 그 말에 대한 대답 대신 정수씨라는 호칭이 너무 정없지 않냐는 시비가 걸려왔다. 아... 네 그럼. 정수 형님. 그러면서 본인은 [내일 찾으러 갈게용 사장님!!!]이라고 보낸다. 뭐하는 사람이지?

 

ㅤ이번 달의 스마트스토어 상품은 여름 한정 조개모양 도자기 키링이다. 모가지가 부러져라 구부린 채로 조개와 소라들을 빚었다. 돌멩이 키링 만들 땐 몸이 너무 편해서 생각이 막 들었었나봐. 조개 디테일 넣겠다고 씨벌 좆뺑이 치고 있으면 아무런 생각도 안 든다. 강제로 심신 건강한 자가 됐다. 의자에 앉았다가 바닥에 앉았다가 스탠드 책상에 서서 빚었다가 자세를 계속 바꿔가면서 작품을 만든다. 그러다 문이 열리는 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기다리던 정수가 저번이랑 같은 쿠키 상자를 들고 있었다.

 

ㅤ"왔어요?"

ㅤ"안녕하세요오."

 

ㅤ민망한지 인중 늘리면서 들어오는 정수에게 의자를 빼서 앉으라 손짓했다. 나 이것만 정리하고 올게요. 벌써 세 번째 오는 건데 뻣뻣하게 굳어 있는 뒷모습이 웃기다. 팔토시와 앞치마를 넣어놓고 온 지석이 책상으로 다시 다가왔다. 작은 상자와 완충재로 예쁘게 포장해 둔 정수 도자기를 건넸다. 생각보다 예쁘게 나왔어요. 근데 저번에 만든 고양이보다 작은 게 흠이네요. 하지만 정수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인스타 카메라로 사진을 찍었다. ‘귀엽다, 김정수♥’ 라고 텍스트 넣는 것까지 보고 떨떠름하게 못 본 척했다. 예술인은 참 어쩔 수가 없군.

 

ㅤ작업실 불을 끄고 정수와 함께 나섰다. 걸어서 십분 거리에 사는 사람을 두고 다른 동네 사람이 또 술집을 찾아왔다. 메뉴는 먹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결정하는 게 맞지. 그런 핑계로 귀찮게 서치하는 과정을 회피했다. 테이블석 두 개에 다찌석 몇 개만 있는 작은 가게를 잘도 찾아왔다. 사장님 오늘도 제가 살 테니까 많이 드세여. 있는 집 자제분이신가? 뭘 자꾸 자기가 산다고 그래. 그러나 혼자서 참치타다끼에 문어샐러드에 치킨난반을 고르고 이제 저 먹고 싶은 거 고르라기에 만류하는 건 포기했다. 음식을 주문하자마자 주방 쪽을 일 분에 한 번씩 돌아보는 걸 보다가 주머니를 뒤졌다.

 

ㅤ"정수씨 이거요."

 

ㅤ지석이 테이블에 비닐 포장된 키링을 내려놓았다. 이번 달 판매작인 조개와 고동, 불가사리를 하나로 엮은 바다 키링이었다. 가장 예쁘게 만들어진 것들을 잘 구워서 일빠로 만들었다. 지석은 이렇게 주변 사람들에게 손으로 만든 흙덩어리를 선물하는 걸 좋아했다. 그냥 몇 번 주물럭거려서 만든 건데 대부분 좋아해줬다. 정수는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눈을 제일 크게 떴다. 어! 진짜요? 이거 저 주시는 거예요? 이렇게까지 리액션이 좋을 때 제일 만들어주는 보람이 있다. 바로 비닐에서 키링을 꺼낸 정수가 크로스백에 달았다. 그걸 사진으로 찍고는 SNS에 업로드까지 하는 듯했다. 아이고 이거 홍보 효과까지 톡톡했다. 그 때 주문한 메뉴들이 한 번에 나왔다. 먹을까요? 두 사람이 동시에 젓가락을 집어들었다.

 

ㅤ시작은 화기애애했다. 친구 많다더니 정수는 말을 재밌게 잘 한다. 그리고 지석이 말 한 마디 하면 이빨이 다 보이도록 쪼개는 리액션의 황이었다. 정없게 정수씨가 뭐예요. 정희보다 한 살 많다면서. 그럼 내가 형이네. 네 정수 형님. 한 잔 받으시죠.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간만에 많이 마셨다. 그러나 정확히 네 시간 뒤에 지석은 정수에게 주겠다고 키링을 엮던 자신이 사무치게 불쌍해졌다. 계속 시키길래 존나 주당인 줄 알았는데? 이제 집에 가자며 의자에서 일어나면서부터 재앙이 시작됐다. 어어? 사장님 지진인가봐요! 예? 뒤를 돌아보니까 이미 포복술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 과정에서 가방에 달아뒀던 7월 GAON 작가 바다 에디션 키링이 개박살났다. 아 제발... 결국 계산하고 버겁게 덩치 차이 나는 건장한 남성을 이고지고 편의점 의자에 앉혔다.

 

ㅤ"컨디션 사 올게요 여기 있어요."

ㅤ"네엥."

 

ㅤ안 좋았던 첫인상이 무색하게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요?...... 안타깝게도 지석은 술버릇 사나운 사람과 우정을 지속한 적이 없다. 자제력과 배려심의 문제라고 생각했다. 시뻘건 얼굴을 하고 앉아있는 정수에게 생수와 컨디션을 건넸다. 먹어요. 술 깨고 들어가요. 그러나 먹으라는 물은 안 먹고 정수가 고개를 돌린다. 저 들어가요? 여기 의정분데? 우리 집은 안산인데? 어디 사시는 분인지는 그때서야 처음 알았다. 아 그러시군요 멀리 사시네요... 읊조리는 말투에서 거리감이 확 벌어졌다는 게 느껴지자 정수가 입술을 쭉 내밀며 칭얼거렸다. 우리 형동생 하기로 했잖아요. 재워줘요오. 재워주세요. 아니 이 사람 왜 이리 귀척을?

 

ㅤ"네... 그럼 작업실에서 주무시고 가세요."

ㅤ"작업실에서 살아요?"

 

ㅤ아니 전 집에 가죠. 그럼 나도 집에 데려가야죠. 아니 아... 아... 알겠어요. 일단 술 좀 깨시고요. 식은땀이 흐르는 환상통을 느끼며 늘어진 앞머리를 쓸어넘겼다. 그제서야 싱글벙글 웃으면서 입에 털어넣는 걸 보고 뭔가 잘못됐다는 걸 직감했다. 말 없이 원룸으로 걸으며 중간중간 휘청거리는 정수를 돌아봤다. 지석과 눈이 마주칠 때마다 히히 웃는 게 꼴보기 싫었다. 공동 현관문을 열고 지끈대는 이마를 짚었다. 빨리 와요. 네! 쿵쾅거리면서 뛰어오는 취객의 등을 떠밀고 계단을 올랐다. 아 정말이지 피곤하다. 내일 보내자마자 이 사람 차단해야지.

 

ㅤ"실례합니다~."

 

ㅤ실례인 걸 알면 들어오지 마세요. 라고 퀭한 얼굴로 씨부렁거렸다. 세상이 아주 정신병자를 가만 두질 않는다. 신발을 벗고 들어온 정수가 옷도 안 갈아입고 매트리스 위로 쓰러졌다. 그러든가 말든가 지석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어질어질하네. 하루 새에 몇 년 늙은 것 같은 얼굴을 찬물로 대충 빨았다. 루틴상으로는 무사 귀가한 것 같은데 문을 열면 몸을 뒤척거리면서 침대에 누워있는 김정수가 있다. 서랍장을 열어서 잠옷을 꺼낸 지석이 정수 배 위로 대충 던졌다. 이제 손님이라고 예의고 뭐고 안 차린다. 내일이면 안 볼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 더러운 옷이나 좀 벗으세요. 그러자 잠옷과 지석을 번갈아 보던 김정수가 징그럽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ㅤ"옷 갈아입으라고요?"

ㅤ"네네."

ㅤ"그럼 지금 입고 있는 거 벗으라는 거네요?"

 

ㅤ씨익.

 

ㅤ...아 씨발 그냥 도자기로 만들어버리고 싶다. 정희야 진짜 미쳤니. 이런 사람을 나한테 보내? 우정을 원수로 갚고, 아무짓도 안 했는데 한 번 더 갚는 우리 착한 김정희. 잘 키웠다. 낑낑거리면서 티셔츠를 벗더니 지석의 김칫국물 에디션으로 갈아입은 정수가 이번에는 와이드 청바지를 끌어내리며 말했다. 지석씨가 저 따먹으려고 여기까지 데려온 거구나... 그래요 저 지금 벗었어요... 저기요. 여기 방음 안 되거든요 좀 닥치실래요? 요즘 보기 드문 건실한 청년인 줄 알았는데 순 멘헤라 개저씨였다. 당장 네 오빠 데려가라고 정희에게 보이스톡을 걸었지만 받지 않는다. 나한테 똥 투척해놓고 자긴 숙면중이라고? 그러다 갑자기 조용해져서 등골이 서늘해졌다. 잔뜩 겁 먹은 채로 천천히 뒤를 돌아봤다. 직전까지 지랄한 게 꿈이었던 듯 이불에 고개 처박고 주무시고 계셨다.

 

ㅤ다음 날 일어나면 사라져있길 바랐건만. 곽지석보다 한참이나 늦게 기상하셨다. 일어났어요? 네에... 상쾌한 표정으로 기지개까지 켜는 걸 보는 얼굴이 시껌었다.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 이불도 없어 맨바닥에 누워 있느라고 결국 한숨도 못 잤다. 술버릇이 참 화려하시더라고요... 갈비뼈가 다 보이도록 상체를 펼쳐놓고 있던 정수가 비꼬는 지석을 멀건 얼굴로 봤다. 저 어제 취한 거 아닌데요?

 

ㅤ"…어제 안 취했다고요?"

ㅤ"네!"

ㅤ"네... 얼른 가세요 알겠어요."

 

ㅤ진짜 이 새끼 개또라이인가봐. 그 와중에 김칫국물 티셔츠 갈아입고 간다고 하길래 옷 쑤셔박아둔 종이봉투만 내밀었다. 그거 그냥 가지세요. 저 작업실 가야 되니까 얼른 나가주시고요. 그렇게 눈꼽도 못 떼고 지석의 손에 떠밀려서 쫓겨났다. 창문을 통해 정수의 걸어가는 뒷모습을 확인한 지석은 인스타그램과 카카오톡을 모두 차단했다.

 

 

ㅤ**

 

 

ㅤ곽지석은 인성쓰레기정신병자예술충이다.

 

ㅤ그런 곽지석에게 김정희는 정신병자미친새끼예술충동성애자를 소개해줬다.

 

ㅤ무서워서 여자 안 만나고 살았더니 남자한테서 제대로 큰 코 다쳤다. 정신병자 바리에이션 존나 넓다. 아무래도 나는 초년운이 안 좋은 것 같다. 외할머니 때부터 다녔다는 무당집을 처음으로 찾았다. 유사과학에 돈 쓰지 말라고 바락바락 소리 지르던 아들이 그 집 어디냐고 전화하니까 의아해하면서 보내주신 주소로 갔다. 백발의 미미선녀는 지석이 신발 벗고 들어서자마자 한 마디 던진다. 아따 팔자 한 번 드세다. 굳이 돈 써가며 재수 없는 소리 들으러 가는 엄마를 이해 못하는 불효자였으나 이제는 선녀님 치맛자락이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다. 전 대체 어디가 어떻게 재수가 없길래 이런 쓰레기만 꼬이나요?

 

ㅤ"여장부밖에 못 만나는 팔자."

 

ㅤ여장부요? 그럼 좋은 거 아닌가? 지금까지의 여자 친구들을 생각해봤다. 조폭 마누라. 전교회장. 김정희가 이어준 걔. 다들 지나치게 강인하고 건강한 애들이긴 했다. 소름끼친다. 그거 하나 맞힌 거 가지고 곽지석은 이제 거의 선녀님을 맹신하게 됐다. 선녀가 곽지석의 생년월일생시를 보고 거의 저주에 가까운 말을 퍼붓기 시작했다. 태생적으로 정신병 있어. 증조 할머니 위쪽으로 가족력 있지? 평생을 바깥보다 안쪽에서 괴롭히는 팔자야. 아무리 멀쩡한 사람 만나도 자기 성질 못 이겨. 상처만 입지 결국에는 안 끌리게 돼 있어. 니 성격에 참고 못 살아. 연애운 없는 건 아닌데 근데 여자는 또 장군님 대통령 회장님밖에 못 만날 거다.

 

ㅤ그냥 수절하다 나가 뒤지라는 소립니까. 이 정신병이 치료되는 종류가 아니라고요? 제가 그냥 본투비 미친새끼라고요? 멍하니 앉아 있다가 뱃속의 곽지석이 고추 달린 걸 맞혔다는 이 선녀님께 반쯤은 울먹이며 물었다. 그럼 전 어떡해요? 그러나 선녀님은 보기보다 냉정했었다. 그냥 살아야지. 싫으면 아내 말고 남편이랑 살아야지. 정신 깨끗한 사람 말고. 너는 너보다 더 지랄맞은 사람 만나야 그나마 억누르고 살겠다......

 

ㅤ아 세상에 그런 사람이 있겠냐고요?!

 

 

ㅤ**

 

 

ㅤ그냥 MBTI 검사 정도로 생각하면 좋을텐데. 역시 나는 여사님 아들이 분명하다. 작업실에 놀러오겠다는 친구들 연락을 모두 거절하고 라꾸라꾸에 드러누웠다. 커피 캡슐 살 돈도 없다 이것들아. 정신병자 남편을 만나라는 전언에 게이만남어플을 깔아보기도 했으나 프로필 등록 직전에 현타가 와서 관뒀다. 곽지석은 남자를 보고 세울 수 있는 인간이 아니다. 결국 흐느적흐느적 일만 하면서 지냈다. 요즘은 월초에 한정 수량으로 올리는 토끼 접시와 강아지 접시를 만든다. 그래 돈이나 벌자... 지석의 통증과 비례해서 SNS 팔로워는 늘어갔다. 그때쯤에 의문의 팔로워에게서 DM이 왔다.

 

ㅤ작가님 안녕하세요!

ㅤ한달쯤 전에 작품 구매했는데 녹이 슬어서요

ㅤ혹시 수선 가능할까요?!

 

ㅤ도자기에 무슨 녹이 슬어요? 살다살다 이런 빠가야로는 처음 본다. 지석이 답장이 없자 곧 엄지 손가락이 도자기를 문지르는 짧은 영상이 도착했다. 지석은 그걸 보자마자 육성으로 소리질렀다. 영상 속의 도자기는 몇 달 전에 김정수가 만들어 간 흰색 고양이였다. [이상하게 닦아봐도 잘 안 닦여요.] [근데 저 왜 차단하셨어요? ㅠㅠ] [홈페이지에 6개월 내로 A/S 된다고 돼 있던데...] 빠른 속도로 올라가는 DM창에 두 눈 질끈 감았다. 안 먹힐 거 아는데 마지막으로 몸부림을 쳐 본다. 아 네 작업실 주소 알려드릴테니 택배로 보내시겠어요? [제가 마침 그 근처에 갈 일이 있어서 직접 방문하겠습니다!] 아니 안산 산다는 인간이 의정부를 공중화장실처럼 드나들 이유가 뭔데? 그럼 작업실 앞에 두고 가시라고 답장한 뒤에는 아예 휴대폰을 뒤집어버렸다.

 

ㅤ나는 이 사람 얼굴 보는 것도 껄끄럽고 짜증나 죽겠는데. 이 사람은 안 그런가? 언제 몇시에 두고 가야하는지까지 정해줄걸. 잠깐 편의점에서 음료수 사 오는 길에 딱 마주쳤다. 작업실 앞에 쇼핑백을 두고 인증용 사진을 찍는 듯하던 정수가 지석을 발견하곤 손을 흔들었다. 사장님. 아니, 지석씨! 호칭 당장 사장님으로 다시 올려라. 똥 씹은 표정으로 고개 숙인 지석이 쇼핑백을 챙겼다. 예 안녕하세요. 제가 한 번 보고 수리 되면 연락 드릴게요. 정수가 알겠다는 대답 대신 꿍얼거린다. 어떻게 연락 줄 건데요? 나 다 차단한 거 아니에요??? 누가 고객을 그렇게 차단하지.

 

ㅤ"......그 계정은 차단 안 했어요."

ㅤ"다른 건 다 했다는 거네."

 

ㅤ와. 진짜 나쁘다. 아 도대체 내가 이 또라이한테 잘못한 게 뭘까? 얌전히 찌그러져서 도자기나 빚고 살았는데 어쩌다 이런 사람한테 걸린 거지? 곽지석은 회피는 잘 하지만 대놓고 끊어내는 데는 소질 없었다. 싫은 말을 잘 못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용기를 내봤다. ...저기요 김정수씨. 죄송하지만 저는 주량 조절 안 하는 사람 가까이 안 둬요. 그 말에 옹이구멍 같은 눈이 땡그래진다. 아니 저 그 때 안 취했다니까요!!! 지석은 정말 울고 싶었다. 태어나서 이렇게나 나를 능가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인간이 아니라 차라리 크툴루 신화에 나오는 초월적 존재 같았다. 그만큼 압도되는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ㅤ"...원하는 게 뭐예요?"

ㅤ"도자기 고쳐주세요."

ㅤ"네."

ㅤ"제 눈 앞에서요."

ㅤ"......여기서요?"

ㅤ"작업실에서요."

 

ㅤ결국 다시는 보지 않겠다 선언한 인간을 작업실에 들였다. 더는 실랑이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익숙하게 책상에 앉은 정수가 지석이 꺼낸 고양이를 내밀었다. 녹슬었다던 고양이는 겉보기로 매끈하다. 도자기에 녹 같은 게 슬리 없으니까 당연한 거였다. 예상했던 바라서 화도 안 났다. 고객님 이건 물때라고 하는 거고요. 왜 물때가 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관리만 제대로 해 주시면 괜찮을 거예요. 소독 물티슈로 닦으니까 다시 반짝반짝해진 고양이를 완충재로 포장했다. 됐죠? 그러면서 마주 본 정수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네에. 감사합니다. 후......

 

ㅤ"안녕히 가세요."

ㅤ"지석씨 제 얘기를 좀 들어보세요."

 

ㅤ안 들어요 가세요. 그러나 김정수는 여느 때처럼 막무가내다. 제가 며칠 전에 사주를 봤는데요. 안 듣는다고요.

ㅤ주변에 저를 꼭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대요. 제가 그 사람한테 귀인이 되는 한해래요. ㅤ네 근데요.

ㅤ그 사람 근처에는 흙이랑 금속이 엄청 많다고... 네 그래서요?

ㅤ근데 제 주변에는 흙이랑 금속 다루는 사람 지석씨밖에 없거든요. 진짜 뭐 어디 사이비를 다녀왔길래 저런 것까지 다 지어내서 말해주나? 들은 척도 안 하고 창고로 향했는데 뒷통수에서까지 말이 이어졌다. 정희랑 같이 갔는데 정희도 무조건 지석이 오빠 얘기래요! 왜 호칭까지 그대로 옮겨 부르는 거야?

 

ㅤ지석은 정리할 것도 없는 펜트리를 괜히 툭툭 건드렸다. 질서정연하게 쌓아둔 흙과 색소들이 약간씩 이동했다.

 

ㅤ"그래서 뭐 무슨 말 하고 싶은 거예요?"

ㅤ"네?"

ㅤ"나랑 사귀고 싶어요?"

ㅤ"네???"

ㅤ"하......"

ㅤ"지석씨 그게,"

ㅤ"아니 전 귀인이고 귀신이고 필요 없어요. 저는 얼마 전에 무당 만나고 왔거든요?"

 

ㅤ그 분이 그러는데 저는 사람 못 만난대요. 귀인이고 자시고 제 정신병 못 이겨서 자멸할 운명이랍디다. 정수의 말들은 안 그래도 샤머니즘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 곽지석을 자극하는 발언이었다. 그래서 그렇게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어진 건 정수의 우렁찬 비명소리 뿐이었다. 이건 또 무슨 신의 농간인 거지. 10KG짜리 도자기흙 군단에 깔려 쓰러진 지석에게 달려온 정수가 허겁지겁 치우며 괜찮냐 물었다. 이런 거 보면 사람은 참 착한데... 그렇게 생각하며 액체 색소 상자에 얻어맞은 대가리 덕에 눈앞이 흐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ㅤ아 진짜 팔자 졸라게 사납다...

 

ㅤ빛이 번지고 눈물이 고여서 뭉개진 시야에 정수의 얼굴이 가득 찼다. 그 때 선녀님의 목소리가 계시처럼 떠오른 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일까. 나는 아내 말고 남편이랑 살아야지. 정신 깨끗한 사람 말고. 나보다 더 지랄맞은 사람... 지랄 맞은? 아 진짜 지랄하지 마라... 골방에만 틀어박혀 있어 연약한지라 그렇게 기절하고 말았다.

 

 

ㅤ**

 

 

ㅤ정신을 차렸을 때 지석은 라꾸라꾸 위에 얌전히 누워있었다. 어 괜찮아요? 한 쪽 눈만 뜬 채로 정수가 말하는 쪽을 쳐다봤다. 네... 한숨을 내쉬면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너무 너무 피곤해서 그냥 세상을 뜨고 싶다. 조개 도자기 만들다가 약간 호전된 듯했던 정신병 증세가 다시 살살 올라왔다. 나를 이대로 두면 하루종일 미친새끼 상태가 될 게 분명하다. 누워있던 몸을 일으키자 움찔한 정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제서야 얼굴을 똑바로 올려다 봤다. 약간 눈치 보고 있는 듯했다. 저 사람 감정은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

 

ㅤ서 있기만 해도 키 차이가 나는데 앉아서 올려다보니 까마득했다. 저 위에 있으니까 좀 무섭게 생긴 것도 같다. 제멋대로 뻗친 머리를 손으로 헝클이고 도자기만큼 하얀 손을 덥석 붙잡았다. 흙 묻지 않은 상태로는 처음 잡는데 남자치고 말랑한 손이었다. 화들짝 놀란 정수가 왜 그러시냐 물었다. 이 사람이 진짜 내 귀인일까. 사이비라고 욕하기는 했으나 찝찝하게 맞아 떨어지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지석은 궁금해졌다. 선녀님 말대로 정신병자 남자를 만나면 내가 좀 괜찮아질지. 그런 팔자라는 게 정말 존재하기는 하는지. 이 또라이를 만나다 보면 나의 모든 것들이 정말 억눌리게 될는지.

 

ㅤ"사귑시다."

ㅤ"네?"

ㅤ"만나보자고요. 어차피 원하던 거 아니에요?"

 

ㅤ정수는 말을 잃고 멍때리고 있었다. 엉덩이를 떼고 벌떡 일어선 지석이 한참이나 위에 있는 장정의 뺨을 붙잡고 입 맞췄다. 이것이 운명 같은 남자와의 첫키스다. 나름 박력 있게 행하기는 했으나 모가지가 뽑힐 것만 같았다. 냅다 부딪힌 거라서 느낌도 감정도 미적지근하기만 하다. 그런 생각하고 있을 때 곽지석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며 순식간에 벽에 쳐박혔다.

 

ㅤ"이런 미친!"

 

ㅤ얼굴이 시뻘개진 정수가 주먹을 쥐고 이쪽을 내려다 봤다. 아 이거 아니었어?

 

 

너의 미친 이웃을 사랑하라

​ㅤ**

 

 

ㅤ[오빠]

ㅤ[답장해라]

ㅤ[우리 오빠의 입술을 빼앗아놓고 잠수?]

 

ㅤ아 죽기 직전까지 맞았으면 죗값 치른 거 아닙니까? 퀭하게 가마 들여다보면서 시리의 목소리를 듣다가 결국 휴대폰 들고 답장했다. 아 왜. 김정수 자취방 좀 가봐. 일 있는 것 같은데 나는 못 감. 내가 거길 왜 가? 그러자 황당무개한 답장이 돌아왔다. 오빠 남자친구잖아? 남자친구라는 단어가 황당할 만큼 낯설게 느껴진다. 내가 왜 그 분 남자친구냐... 오빠가 먼저 고백했다며. 김정수는 그런 걸로 알던데. 아니었어? 오빠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쓰레기였어? 정희는 지석을 본 기간에 비해서 참 잘 긁었다. 맞다 얘 심리학과였지. 결국 하던 것 접고 안산으로 출발했다.

 

ㅤ진짜 드럽게도 멀었다. 이걸 몇 번이나 왕복한 김정수에 대한 경외심이 솟아오른다. 버스에 몸을 실은 채로 멍하니 창 밖을 내다봤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정희가 보내준 주소로 정수가 사는 오피스텔을 찾아냈다. 호수까지 알고 있는데 공동 현관문이 잠겨 있었다. 205호를 누르고 호출 버튼을 눌렀다. 얼마 안 있어 스피커로 정수 목소리가 들렸다.

 

ㅤ[누구세요?]

ㅤ"전데요."

ㅤ[누구신데요?]

ㅤ"곽지석이요."

ㅤ[엥? 저희 집 어떻게 알았어요?]

ㅤ"......일단 문 좀 열어봐요."

 

ㅤ뒤이어 문이 열렸고 계단을 올랐다. 현관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정수가 열고 나와 있었다. 지석씨 여긴 왜??? 정희가 가보라던데요. 왜 그랬지? 일단 들어오세요. 그렇게 말하고 정수가 뛰어 들어간 오피스텔 안에서 뭐가 박살나는 소리가 들렸다. 발로 이불을 밀던 정수가 머쓱하게 웃었다. 생애 첫... 남자친구? 그러고 보니까 김정수씨랑은 뭐가 어떻게 된 거지? 아무튼 자취방에 들어섰다. 여태 누워 있었는지 잠옷차림에 머리가 산발이었다. 딱히 관심 있는 건 아니라서 아무데나 주저앉았다. 무슨 일 있으시다더니. 어디 아프세요? 그래서 여기까지 오신 거예요? 묻는 얼굴이 묘하게 감동 받은 것 같아서 괜스레 말이 삐딱하게 나왔다. 걔가 협박했어요. 뭘로요? 거기엔 답하지 않았다.

 

ㅤ막상 왔더니 뭐 아무 일도 없어 보인다. 단순히 김정희의 지랄병이었나? 그러나 정수가 지석을 등지고 이불을 개면서 털어놓았다. 아 학교에서 제가 오늘 너무 못해가지구 좀 찡찡댔더니 신경 쓰였나봐요.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해요. 아이구... 그냥 성적 정병이셨구나. 지석 또한 학교 다닐 때 등수에 일희일비하는 미친놈이었으니까 아주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이제 보니까 얼굴에 허옇게 눈물 자국까지 나 있었다. 울기까지 할 정돈가. 뭐 얼마나 못했길래요? 묻자 쪼그리고 앉아있던 김정수가 지석을 돌아봤다.

 

ㅤ"그냥... 제가 한 번 성대결절 왔어서 지금 좀 힘든데요."

ㅤ"아아 그러시구나."

ㅤ"근데 평소에 저 나이 많다고 긁는 새끼가 저랑 곡을 똑같은 걸 골라서..."

ㅤ"아아..."

ㅤ"좆같은새끼... 씨발 죽어.“

ㅤ"오우..."

 

ㅤ말투랑 욕이랑 진짜 안 어울린다. 그런 감상만을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하던 김정수가 고개를 푹 숙였다. 다시 우는 것 같았다. 아 뭐 저렇게까지 힘들어할 일인가. 싸이코패스라서 위로 같은 걸 잘 못하는 곽지석이 다가가서 어색하게 등을 쓸었다. 아이 울지 마세요. 학교 성적 같은 거 하나도 안 중요해요. 저도 학점 2점대로 졸업했는데 지금 밥벌이 하면서 살고 있잖습니까... 킁. 그러자 코를 들이마신 정수가 울먹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ㅤ “지석씨가 뭘 알아요.”

 

ㅤ썅 사람이 쥐어짜서 위로해주는데 말하는 꼬라지를 보게. 지석씨처럼 성공한 사람은 나 같은 사람 이해 못 해요. 그냥 학점 때문이 아니라아... 그냥... 한참 어린 애들한테 이런 생각하는 내가 너무 싫어서요... 남들이랑 자꾸 비교하게 돼요. 이런 데 에너지 쏟는 게 너무 힘들어요......

 

ㅤ와 진짜 멘헤라.

 

ㅤ그닥 친하지도 않은 사람한테 심연까지 술술 불어대는 게 아주 정신병자의 정수다. 이런 말 혼자 속으로 해보기나 했지 직접 들어본 적은 없어서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정말 뭐라고 해줘야 될까? 너무 속상한 얼굴로 눈물을 뚝뚝 떨구는 정수의 등을 조심스럽게 쓸면서 되는대로 지껄이기 시작했다. 저라고 뭐 다르겠습니까. 예체능 하는 사람들이 다 그렇죠. 저도 그래요. 저는 입시할 때부터 저보다 잘하는 애 있으면 고까워서 죽어버리려고 했고 과에서 3등 했을 때는 너무 분해서 이틀동안 위액 토했어요. 그리고 요즘은 저보다 늦게 시작한 도자기 계정 팔로워 매일 확인해요. 다 겉으로 아닌 척 하는 거지 남 견제하면서 사는 건 당연한 거 아닌가? 그런 걸로 너무 괴로워하지 마요. 말하다 보니까 뭔가 내 고해성사가 되어버린 것 같은데. 굳이 안 해도 될 말 한 기분에 찝찝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다. 내내 눈만 보이게 엎드린 채로 지석을 쳐다보던 정수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짜예요…?

 

ㅤ"그쵸...? 제가 정상인 거 맞죠."

ㅤ"그럼요."

ㅤ"사실 저도... 싫어하는 선배 코로나 걸렸을 때 좋아했어요."

 

ㅤ전 그 정도는 아니긴 합니다만... 어찌 됐건 위로가 되셨다니 다행이다. 이제 많이 속상하지는 않은지 뻘겋게 올라온 볼로 웃는 얼굴을 보고 안심했다.

 

ㅤ아니 근데 내가 왜 이 사람 집까지 찾아와서 위로를 하고 있지. 뒤늦게 아리송해진다. 이게 선녀님 말 듣고 다짜고짜 입술 박아버린 죄인가. 그런 지석의 옆에서 눈을 접어가며 푸스스 웃은 정수가 잠옷 소매로 흘러내린 눈물을 눌러 닦았다. 그리고는 뜨끈한 입술로 지석의 볼에 입 맞췄다. 너무 순식간이라서 상황 파악을 못 했는데 바보같이 돌아보고 한 번 더 기습당했다. 부끄러운 듯 고개 숙인 정수가 중얼중얼거렸다. 지석씨 진짜 좋은 남자친구네요... 나 걱정 돼서 여기까지 찾아와주고...... 너무 감동인데.

 

ㅤ아?

 

 

ㅤ**

 

 

ㅤ늦게까지 '남자친구' 징징대는 거 들어주느라 '남자친구' 집에서 1박 하게 되었다. '남자친구' 집과 지석의 집은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지석이 푸대접했던 것과 다르게 정수는 바닥에 여름용 이불을 깔고 팡팡 두드렸다. 아니 복층인데 따로 자죠 왜... 복층 안 살아봤죠? 저기서 자면 쪄죽어요. 그런 이유로 '남자친구'와 동침하게 됐다. 작은 연인을 끌어안고만 자봤지 나보다 큰 ‘남자친구’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서 날밤 까 본 것은 처음이었다. 정수는 제 집이라고 편한 건지 혼자 뒤척거리지도 않고 잘만 잤다. 아니 그런데 우리 집에서 잘 때도 나만 못 잤었는데. 자꾸 이런 억울한 구도가 형성된다. 그것은 정말 김정수가 곽지석에게 귀인이라서일까.

 

ㅤ그럼 김정수에게 곽지석은 무엇인가. 뭐가 됐건 곽지석에게 실이 되는 관계는 아닐 거다. 얌전히 눈을 감았다.

 

ㅤ사람이 내뱉는 말에는 정말 어떤 힘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정수와는 정말로 연애 비슷한 걸 시작하게 됐다. 처음 그러자고 했을 땐 단순 오기 파기에 불과했는데 저쪽에서 진심으로 받아들이니 차마 무를 수는 없었다. 정수씨. 진짜 나랑 사귈 생각이에요? 처음 기세랑은 다르게 눈치 보면서 말했을 때 돌아온 것은 그럼 헤어지느냐는 물음이었다. 저쪽은 이미 나랑 연애중이셨구나. 그런 곽지석 인생의 첫 남자는 지극히 평범한 20대 남성이었다. 음악을 하고 남의 재능을 질투하고 3인칭을 사용한다는 점에서만 특이했다. 지석을 보는 눈은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사랑 없이 산 지가 오래 돼서 그런 것도 연애라고 하고 사는 게 힘들지는 않았다.

 

ㅤ평생 인연이 없던 동네에 격주에 한 번 꼴로 방문하게 됐다. 오라고 한 적도 없는데 주말마다 의정부에 올라오는 정수가 서운해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하는 남녀마냥 살 부딪히고 듣기 좋은 말 속삭이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저 작업하는 지석의 옆에서 정수가 영화를 틀어놓거나 정수의 복층 오피스텔에 나란히 누워서 유튜브를 보는 게 다였다. 우린 대체 뭐지. 이젠 함께 있는 게 익숙해졌지만 그게 전부인 것 같아서 가끔은 골몰하게 된다.

 

ㅤ그러다 먼저 관계에 변주를 불어넣은 것은 정수 쪽이었다. 작업실 명당을 차지하고 누워 있던 정수가 물었다. 지석아. 정수의 집에서 처음으로 잤던 날 드디어 형동생처럼 말 놓기로 했다. 따라서 지석이 반말로 답했다. 왜. 정수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쉴새없이 오밀조밀한 조개들을 만들고 있었다. 우리는 어떤 사이야. 예고도 없이 들어온 느끼한 멘트에 지석이 오만상을 쓰며 고개를 돌렸다. 역시나 감성적인 얼굴을 한 채로 천장을 응시하는 정수가 보였다.

 

ㅤ“형이 내 작업실에 빈대 붙는 사이.”

ㅤ“야 뭐라고?”

 

ㅤ아래로 쳐박고 있던 고개가 순식간에 붙잡혀 정수 쪽을 향한다. 당황스럽게 눈을 뜨자 약간 부풀어오른 듯한 얼굴이 시야를 채웠다. 연애 같지도 않은 연애를 시작한 뒤로 제일 가까운 스킨십이었다. 어디서 삔또가 상한 건지 모르겠으나 막무가내 깡패짓이 시작됐다.

 

ㅤ“야. 네가 사귀자며. 근데 우리 너무 무미건조해. 네 사랑을 증명해봐. 사랑한다고 하라고. 빨리 해, 사랑한다고.”

 

ㅤ“아니 형…”

 

ㅤ공감 능력 결여에 한국의 잘생긴 남자로 살아온 곽지석 인생에 그런 협박은 처음이었다. 결국 정수는 사랑한다는 말을 갈취하고 나서야 턱아귀를 놓아주고 도로 드러누웠다. 지석이 손으로 쥐고 있던 키링은 이미 참혹하게 뭉개진 뒤였다. 최초의 고백은 그렇게 이루어졌다.

 

ㅤ편안한 얼굴로 눈을 감은 남자친구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푹 하고 한숨을 내쉬고 다시 고동과 조개와 가재를 만들기 시작한다. 얼마 안 가 들리기 시작하는 코 고는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몇시간동안 기계처럼 손을 움직였다. 그러고 나서도 정수가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아서 내친김에 모래 컵도 몇 개 만들었다. 모든 뒷정리를 마친 뒤에는 햄버거를 주문했다. 그런 사랑하지는 않지만 평화로운 날이었다. 지석은 아직도 왜 그 날의 정수가 사랑을 증명받고자 했는지는 모른다.

 

 

 

ㅤ**

 

 

ㅤ지석은 이른 여름 스토어를 마쳤다. 수많은 자갈과 모래알 식기와 조개 고동 키링들이 우후죽순 팔려나갔다. 이렇게 무사히 판매할 때마다 주머니 사정이 든든해진다. 역시 정신병은 금전으로 치료하는 거다. 만나면 김정수 맛있는 거나 사줘야겠다. 그러다 작업실에 놀러오지도 않은지가 오래라는 걸 문득 깨달았다. 많이 바쁜가? 간만에 할 일 없이 축 늘어져 있는데 카톡이 왔다. 김정순가. 했는데 발신인은 정희였다. [오빠 김정수 발표회 가?] 김정수와 발표회라는 단어의 조합이 생소해서 눈만 꿈뻑거렸다.

 

ㅤ[김정수 발표회 해?]

ㅤ[걔네 과 항상 기말작품발표회 해]

 

ㅤ어 근데 왜 말 안 했지. 바빠서 까먹었나. 그렇게나 부담스러워했던 김정순데 계속 부대끼며 지냈다고 이젠 서운해할 줄도 아는 스스로가 웃겼다. [가야지] [오랜만에 보겠네] 날짜는 바로 사흘 뒤였다. 안 그래도 할 일도 다 끝난 터라 타이밍이 좋았다. 그래도 맨손으로 가는 건 아닌 것 같아 꽃다발 픽업 예약을 마쳤다. 말 없이 거기까지 가면 엄청 놀라겠다. 왜 말 안 했냐고 갈궈야지. 간만에 제가 우위에 설 생각을 하니까 웃음이 절로 새었다.

 

ㅤ언제 마지막으로 봤는지도 모르겠다. 알바를 그만둔 뒤로 오랜만에 보는 정희는 머리가 좀 길어진 것 말곤 변한 게 없었다. 오빠 하이. 그 때처럼 곽지석의 잘생긴 얼굴을 봐도 관심 하나 없는 태도. 어색하지도 않은지 휴대폰 만졌다가 농담 던졌다가 정신 없는 말투. 정말 달라진 게 하나도 없구나. 정수만 봤을 땐 몰랐는데 둘이 생긴 게 좀 닮았다. 전체적으로 동글동글한 인상이... 요 며칠 못 본 정수가 어떻게 생겼었는지 생각하다 곧 징그럽단 생각에 관뒀다. 곧 볼 건데 뭐. 목화 꽃다발을 들고 있는 지석을 흘겨본 정희가 놀리듯 호응했다.

 

ㅤ"애인 보러 온다고 꾸몄나보네?"

ㅤ"야. 다 너 때문이잖아."

ㅤ"에이. 그래도 김정수랑은 잘 만나잖아. 아니야?"

 

ㅤ반박할 가치도 없는 말이라서 그냥 대답하지 않았다. 정희가 끌고 가는 곳으로 천천히 걸었다. 어두운 공연장에 들어서서 휴대폰을 들여다봤다. 여전히 정수에게선 아무런 연락 없었다. 직전까지 연락을 안 한다고? 이거 일부러 안 알려준 거 아니야? 문득 든 생각에 정희를 흘겨봤으나 열심히 카톡질이나 하고 있길래 말은 안 걸었다. 관객들이 다 입장하고 시작 시간이 되자 공연장은 완전한 암전이 되고 조명이 켜졌다. 실용음악전공 학생들이 한 명씩 무대 위로 올라왔다. 키 큰 놈 어디 있나. 목이 빠져라 찾던 정수는 마지막에 들어와서 지석과 가장 먼 곳에 자리했다. 죄 지은 것도 아닌데 꽃다발로 얼굴을 가렸다. 학생들이 한 명씩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시작했다.

 

ㅤ정수는 세 번째 마디에서 마이크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까 정수가 노래하는 거 처음 듣는다. 정신병자 예술충 보컬 전공의 실력은 어떨까. 늘 옹졸하게 다물려만 있던 입술이 열리고 말할 때랑 크게 다르지 않은 목소리로 노래하는 게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다. 지석은 눈 튀어나오도록 뜨고 깜빡거렸다.

 

ㅤ좀 놀랐다. 솔직히 압도적이던데. 이런 실력 가진 김정수를 나이 많다고 긁은 새끼는 진짜 어디 모자란 새끼인가. 팔이 안으로 굽은 게 아니라 진짜 김정수가 제일 잘했다. 그 때 나름 잘 숨어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관객석 둘러보던 정수와 눈이 마주쳤다. 나름 여유를 연기하던 눈이 지석을 보자마자 철렁하고 움직인다. 정수가 먼저 눈을 피했다. 당황한 듯 했으나 애써 티내지 않으려는 얼굴이 필사적이었다. 5분짜리 발표회는 무사히 끝났다. 간단한 인사를 마친 뒤 학생들이 무대에서 내려왔다. 종강을 축하하는 인사들이 들린다. 그러나 기다려도 정수는 보이지 않았다. 결국 정희가 이름을 불러대며 정수를 찾았다.

 

ㅤ여기까지 들어가도 되나? 이곳저곳 무례하게 뒤져대는 정희를 따라다녔다. 마지막으로 관객석을 벗어나서 무대 옆에 딸린 대기실 문을 열어젖히자 소파에 주저앉은 큰 사람이 보인다. 얼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머리 푹 숙이고 있는 김정수가 보인다. 야 여기서 뭐해? 정희가 가서 건드리자 무릎에 팔꿈치 괸 자세로 손을 탁 친다. 건들지 마. 아까까지 노래는 잘만 하던 목소리가 가라앉아 있었다. 지석이 오빠도 왔는데 왜 이래. 그 말에 그제서야 고개를 들어올린다. 무대한다고 나름 메이크업 했나본데 눈물 뚝뚝 흘리는 바람에 추하게 녹아내리고 있었다. 지석이 왜 불렀어. 나? 나 때문에 우는 건가 싶어져서 황당한 얼굴로 정희랑 눈 마주쳤다. 손목으로 얼굴 벅벅 닦더니 또 자낮 발언이 이어졌다. 나 목상태 안 좋다고 했잖아. 오늘 개못했는데. 일부러 곽지석 안 불렀는데 왜 부르냐고......

 

ㅤ"아니..."

ㅤ"우우.."

ㅤ"아니...오빠 미안해."

 

ㅤ이제는 어깨까지 들썩거리면서 우는 정수에게 한 번, 멍하니 꽃다발 들고 서 있는 지석에게 오빠 정말 미안, 이라고 두 번 사과한 정희가 슬그머니 걸음을 옮겼다.

 

ㅤ쟌넨. 뭐라고? 그림자처럼 사사삭 움직인 정희는 대기실 문 닫히는 소리와 함께 그렇게 사라졌다.

 

ㅤ"......"

 

ㅤ나도 도망가고 싶다. 우는 사람을 못 본 척 핸드폰이나 만져대는 인간말종이 바로 지석이었으나 그게 잘 아는 사람이라면 얘기가 좀 달랐다. 꽃다발을 부스럭부스럭 들고 다가가서 정수 옆에 조심스레 앉았다. 아니 형 왜 우는 거야... 땅바닥에 눈물 툭툭 떨어뜨리던 정수가 들으라는 건지 혼잣말하는 건지 웅얼웅얼거렸다. 나 개못해서 보여주기 싫었다고...... 내가 제일 못했어 오늘. 자퇴할 거야. 형 그 나이에 자퇴해서 뭐 어쩌겠다고... 정수가 제일 잘했다는 솔직한 감상을 말했으나 돌아오는 건 거짓말하지 말라는 자학뿐이었다. 진짜 이 자낮충을 어찌할꼬. 그 와중에 원래는 더 잘했는데 성대결절 때문에 그렇다는 자기방어까지 톡톡히 챙긴다. 알았어 알았어. 더워서 그런 건지 우느라 그런 건지 땀으로 축축한 등을 쓸어내렸다.

 

ㅤ웃기게도 지석은 그런 정수에게서 과거의 제 모습을 봤다. 대학 다닐 때 지석이 제일 많이 한 짓 또한 나는 재능이 없다며 땅굴 파는 거였기 때문이다. 그럼 착한 친구들이 지랄하지 말라고 얼굴 시뻘개져서 네가 최고인 이유를 읊어주러 왔다. 내 친구들한테 미안하다. 예의상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그냥 존나 답답하기만 했겠구나. 이건 주위에서 아무리 말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혼자 주먹 쥐고 있는 통통한 손에 억지로 꽃다발을 들렸다. 어찌 됐건 수고했으니까 고기 먹으러 갑시다. 내가 쏜다.

 

ㅤ방금 전까지 질질 짜던 사람이 맞나 불판 앞에서는 폭주기관차였다. 스트레스성 폭식이라고 했다. 그래요 많이 잡수세요. 지석은 기가 빨리면 입맛도 같이 빨리는지라 묵묵히 고기만 뒤집어 구웠다. 혼자 3인분 드시고 "너무 많이 먹었나?"하고 눈치 보는 건 무슨 심리지. 사장과 손님으로 만났을 때 이랬다면 차단을 하네 마네 속으로 지랄병 났을 게 분명한데 이젠 그냥 정수가 웃겼다. 어디까지 또라이처럼 굴지 궁금했다. 이제 김정수 인생에서 가장 큰 난제는 한 점 남은 삼겹살을 상추에 싸 먹을지 소금장에 찍어서 본연의 맛을 느낄지 결정하는 문제가 된 게 분명했다. 눈알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서 벨 누르고 냉면 먹을 거냐고 물었다. 정수가 제발 비빔냉면 먹으면 안 되겠냐고 물어왔다. 네 사장님 여기 물냉 하나 비냉 하나 주세요...

 

ㅤ집 갈 힘이 없어서 정수 자취방에서 하루 신세를 지게 됐다. 정수가 익숙하게 여분 이불 꺼내서 깔고 씻으러 간 사이에 옷 갈아입고 주저앉아 핸드폰을 했다. 지석의 작업 계정을 태그해 키링 후기 올라온 것을 모두 스토리에 올린 뒤에야 바닥에 드러누웠다. 오늘 하루... 참 길었다. 추하게 번진 메이크업을 모두 지운 정수가 축축한 머리로 걸어나왔다. 이부자리를 대자로 차지하고 있던 몸을 한쪽으로 치우자 앓는 소리를 내면서 눕는다. 아무 말 없이 계속 폰만 만지자 젖은 물미역이 잠옷 티셔츠를 향해 돌진했다. 으억. 악. 차가워. 왜 이래 미쳤어? 얼굴은 다 탱탱 불어놓고 이젠 또 기분 좋아졌는지 웃는 걸 보고 어이가 없어서 따라 웃었다. 머리맡에 선풍기를 틀어놓고 불을 껐다. 핸드폰 하는 지석 옆에서 자는 듯하던 정수가 뜬금 없이 말했다.

 

ㅤ"지석아 아까 물냉이랑 비냉 시켜줘서 고마워."

ㅤ"둘 다 먹고 싶었지."

ㅤ"어 그래서 내가 다 먹었잖아."

ㅤ"돼지."

ㅤ"그리고 꽃다발 준 거 고마워."

ㅤ"그래."

ㅤ"안 불렀는데 와 줘서 고맙구."

ㅤ"고마운 거 맞어?"

ㅤ"진짜 고맙다니까...!"

ㅤ"예에."

 

ㅤ그렇게 대화가 끊기는 듯하다 다시 말해왔다. 그리고 나 위로해줘서 고마워. 너 없었으면 난... 김정희랑 눈물 젖은 짜장면이나 먹었겠지. 그제서야 밝은 액정에서 눈을 떼고 시선 맞춰오는 지석이다. 아니 형 위로가 아니라 나는 객관적으로 말해주는 거야. 형이 제일 잘했다니까. 야 나도 귀가 있어... 와 나 진짜 답답해서 돌아가시겠네. 주먹으로 가슴팍 퍽퍽 소리나게 치는 걸 보고 정수가 컥컥 웃었다. 야 갈비뼈 부러지겠다. 어떻게 해줘야 믿을래. 나 원래 입 바른 소리 같은 거 못하거든. 웃던 정수가 입을 다문다. 잘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쳐다보고 있는 안광만 약간 보였다. 안아줘 그럼.

 

ㅤ"뭐요?"

ㅤ"그럼 믿을래..."

 

ㅤ아니 뭐 안 믿으면 형님만 손해지 저는 딱히 상관 없는데요. 하지만 거절도 승낙도 하기 전에 정수가 꾸물거리며 다가와 폭 안겼다. 그 덕에 마룻바닥에 대충 깔아놓은 이불이 구겨져서 옆구리가 배겼다. 반쯤 마른 듯한 머리카락이 선풍기 바람에 나풀거렸다. 작게 한숨 내쉰 지석이 버겁도록 들어찬 정수의 뒷통수를 살살 쓸어내린다. 형 어릴 때 어머니가 머리 많이 굴려주셨나보다... 되게 동그랗네... 쓸데없는 소리나 하면서 그 날 밤은 그렇게 잠들었다. 어쩌다 이런 정신병자가 내 인생에 굴러들어왔나. 먼저 잠든 정수를 품에서 떼어놓으면서 지석은 미미선녀님의 전언을 다시금 생각해낸다. 모두 맞는 말인 것도 같다.

 

 

ㅤ**

 

 

ㅤ@fjjfoerklmgg

ㅤ [이거 알리나 타오바오에서 부자재 떼다 파는 걸텐데 키링이 15000원? ㅋㅋㅋ 원가 반의반도 안 될듯 소비해주지맙시다~]

ㅤ ㄴ@jxngsxx._.

ㅤ  [알못아 이거 작가님이 다 직접 만드시는 거임 그리고 가온 작가님보다 못생겼으면 댓글달지마세요]

 

ㅤ"이거 형이지?"

 

ㅤ인스타 가계정들끼리 싸움난 댓글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교양인이 되겠다면서 한 시간째 같은 페이지 펼쳐놓고 핸드폰하던 정수가 놀란 척하면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무슨 소리야? 발연기가 그냥 황당해서 맞지 않냐고 되묻지도 못했다. 지석은 원댓글과 답글까지 모두 삭제했다. 뭐 도자기 굿즈가 생필품이 아닌 건 맞으니까 이런 댓글이 종종 달려도 아무런 신경 안 쓰였다. 만들던 그릇이나 마저 만드려고 창고로 향하려는데 정수가 횡설수설 덧붙여왔다. 야 너 저런 거 신경 쓰는 거 아니지? 난 네 키링 만오천원이 아니라 십오만원이라도 사. 아 진짜 무리하신다. 웃으면서 신한은행 계좌번호를 불렀다. 십오만원 입금해 그럼. 할 말이 없어진 정수가 입을 다문다.

 

ㅤ비교적 공간이 넓은 작업실에서는 주로 따로국밥이 되어 노는데 그날따라 자꾸 작업하는 옆에 와서 서성거렸다. 구부정하게 앉아 물레를 돌리고 있는 지석을 보면서 오오, 잘생겼다, 멋있으시다. 같은 쓸데없는 리액션을 했다. 귀 뒤로 넘겼던 머리가 숙인 고개 때문에 앞으로 흘렀다. 흙 묻지 않은 어깨로 대충 쓸어올리다 결국 남는 손에게 부탁했다. 형. 그딴 말 그만 하고 나 머리나 좀 넘겨줘. 대접 만드는 지석을 찍어 ‘넌 도자기 만들 때 제일 예뻐♥’ 짤을 만들던 정수가 어어 하고 핸드폰을 집어 넣었다. 아무렇게나 어질러진 머리를 귀 뒤로 넘기는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푸훕 하고 웃음 터졌다.

 

ㅤ"왜 그렇게 손을 떨어."

ㅤ"아니 그냥 너무 잘생겨서..."

ㅤ"나 잘생겼어?"

ㅤ"......몰라서 묻는 거야?"

ㅤ"아니 나도 알긴 해."

ㅤ"재수없다."

 

ㅤ크흐흐흑. 김정수에게 가지런한 28개의 치아를 자랑하기는 싫어서 바닥 보면서 쪼갰다. 아니 형 동기는 죽이고 싶다면서. 난 잘생겨서 안 죽이고 싶어? 야 좀 비벼볼만해야 그러지 넌 다른 차원 사람 같아...... 아니 그 정돈가? 김정수는 특유의 하고 싶은 말 많은데 못 하겠을 때 짓는 인중 늘어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뭐 왜. 뭐. 지석아 형이 파렴치한 말 좀 해도 되냐. 뭔데요. 내가 만약에 지금 키스하고 싶다면... 나를 저 가마에 집어넣고 구워버릴 거야? 뭐라는 거야. 형 날 진짜 싸이코로 알아? 그건 아니지만 나 같은 추남이 지저분하게 입 맞추면 불쾌할 테니까... 정말이지 더러워서 못 들어주겠다. 도자기 만들기의 달인 곽지석이 고개만 돌려서 정수를 올려다 봤다. 자. 해.

 

ㅤ"진짜 해......?

ㅤ"하라고. 저번에도 형이 팼지 내가 먼저 했어."

ㅤ"혹시나 억지로 하는 거라면..."

ㅤ"에이 진짜."

 

ㅤ빨리 하라고오.

 

ㅤ조르듯 칭얼거리자 앞에 꿇어 앉고 조심스럽게 뺨 붙잡은 정수가 입술을 갖다댔다. 무슨 조각상에 조심스럽게 입 맞추듯 소중하게 머금었다 떼기만 반복하길래 턱을 들이밀었다. 흠칫 뒤로 밀려난 정수가 뒤이어 입을 벌렸다. 잠깐 붙였다 떼기만 할 생각이었는데. 눈을 꼭 감고 제 머리통에 매달리는 정수의 입안에 결국 침범하게 됐다. 예쁘게 돌아가고 있던 물레 위의 항아리가 기괴한 모양으로 아래로 늘어졌다.

 

 

ㅤ**

 

 

ㅤ지석이 뒤늦게 자취방을 오픈했다. 물론 이전에 방문한 이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집주인 의지로 데려간 건 아니었으니 이번을 처음으로 치기로 했다. 자기자신을 제외한 모든 인간에게서 스트레스를 받는 지석에겐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형 근데 우리 집에 이불이 없거든. 그래서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 나랑 같이 자든지 화장실에서 척추 접고 자든지. 지석아 디스크 환자 되는 건 처음이라서 떨린다. 마음에 안 드는 대답이라 먼저 올라가는 김정수의 듬직한 등판을 주먹으로 퍽퍽 쳤다.

 

ㅤ"드디어 심야버스 타고 집에 안 가도 돼..."

 

ㅤ감격한 듯한 얼굴을 애써 무시하고 도어락을 열었다. 이미 더러운 건 들켰지만 정수가 온다고 해서 나름 청소해놨다. 원래 제 영역을 벗어난 것에서는 꾸미는 데 관심 없었다. 따라서 주방 분리형 원룸은 모델하우스와 다름 없는 깔끔한 집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남의 집 들어갈 때 버릇인가. 어쩔 수 없이 저번 일이 생각났다. 뭔가 웃기다. 그 때는 이 사람 길바닥에 버리고 싶어했는데 지금은 애인이 되어 있다는 게.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되어버린 것도 아니고 제 의지로 그렇게 만든 사람이었다. 뭐 절절한 사랑 하는 건 아니지만 이제 정수와 연애하고 있다는 사실은 자각이 됐다. 뭔가 긴장돼서 마른 침을 삼켰다. 그게 웃겨서 혼자 웃었다. 왜 긴장하는 거냐. 설마 김정수랑 무슨 일이 있을라고. 근데 진짜 무슨 일 생기면 어쩌지. 그래서 혹시 몰라서 지난주에 콘돔 사뒀다. 아이 진짜 안 쓸 건데 사람 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남으면 아이스크림 담아서 짜먹으면 된다.

 

ㅤ먼저 들어가서 야무지게 클렌징폼과 새 칫솔로 씻고 나온 정수는 지석보다 먼저 침대에 드러누웠다. 물어보지도 않고 지가 안쪽 자리에 눕는다. 애인으로서 한 마디 하자면 김정수는 이런 부분에서 염치가 없다. 그런 것에 꽁해질 지석은 아니라서 그냥 먼저 자라고 하고 샤워하고 나왔다. 물론 정수는 자지 않았다. 등 돌리고 자는 척하다가 지석이 옆에 눕자마자 돌아보는 얼굴이 약간 부담스러웠다. 왜애.

 

ㅤ"지석아."

ㅤ"응."

ㅤ"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부부 같다."

 

ㅤ뭐 커플도 아니고 부부...... 굉장히 앞서가시네. 이런 말에 면역은 없어서 대충 대답을 얼버무리자 몸을 틀어 파고들어온다. 지석이 냄새 난다. 나 니 냄새 좋아. 그거 내 냄새 아니고 향수 냄새야 알려줄까? 됐다 이 자식아. 너무 딱딱하게 굴었나 싶어서 안겨있는 정수의 팔을 잡고 쓸어내렸다. 흐흥. 기분은 좋아보여서 다행이다. 얌전히 품에 고개 박고 있던 정수가 불현듯 고개를 틀었다. 곽지석. 응? 갑자기 궁금해졌는데 너 왜 나한테 고백했어? 응? 고백? 되묻자 정수가 몸을 빙글 돌려 엎드린 채로 무섭게 쳐다봤다. 너 나 싫어했는데 갑자기 사귀쟀잖아. ...갑자기 그건 왜 물어보지? 아니 그나저나 그걸 알았는데 받아줬단 말이야?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아 뭘 또 싫어하기까지 했다고... 말해봐. 뭔가 이유가 있었어? 평소처럼 회피하고 대답 안 하는 걸로 끝날 대화 같지가 않았다.

 

ㅤ"아 그냥 그 때..."

ㅤ"응."

ㅤ"내가 무당 얘기 했었잖아."

ㅤ"아 맞다 그거 말하다가 너 기절했었지. 무슨 얘기야? 궁금하네."

ㅤ"그 때 선녀님이......"

 

ㅤ나보다 더한 정신병자 남자를 만나래. 라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아무리 사실이라도 어떻게 당사자 앞에서 그렇게 말하겠냐. 입 꾹 다물고 먼 산을 보자 정수가 옆구리를 찌르고 간지럽혔다. 야. 말하라고. 이상한 말 했지. 아니야아. 그냥 남자 한 번 만나보랬어. 결국 거짓말로 응수한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정수가 기분 나쁘게 웃었다. 흐흐흐헤헤. 뭐야?

 

ㅤ"왜 웃어?"

ㅤ"아니 그냥 웃겨서."

ㅤ"뭐가..."

ㅤ"너 형이 그렇게 멋있었어?"

ㅤ"응?"

ㅤ"그래서 고백했다는 거 아니야? 네 주변 남자들 중에서 내가 제일 착하고 잘생겨서."

ㅤ"이건 또 뭔?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마라 진짜."

ㅤ"야 애인한테 그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

 

ㅤ그런가? 걍 나오는 대로 말했을 뿐인데. 확실히 전 여자친구들한테 이런 말투로 말해본 적은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정수 앞에서는 너무 풀리고 편해졌다. 남자들끼리 있는데 뭘 징그럽게 말투까지 자정해. 서로를 이렇게 대하는 게 우리 방식이라고 정의한지도 오래였다. 사과도 없이 시선 피해버리는 지석을 보다가 정수도 몸을 돌려버렸다. 아 이건 좀 풀어줘야 되나. 그러나 정수가 혼잣말하는 소리에 그런 마음은 모두 사라져버리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버렸다. 전여친들은 다 나 착하고 잘생겨서 좋다고 했는데... 이거 나 빡치라고 하는 소리 맞냐?

 

ㅤ"뭐라고 여자친구?"

ㅤ"뭐."

 

ㅤ역시 전 애인 얘기는 좀 에반가? 그런데 지석이 황당해하는 포인트는 그딴 게 아니었다. 아니 형 게이 아니었어? 예상치도 못한 말에 정수도 얼빠졌다.

 

ㅤ"뭔소리야 나 남자 네가 처음인데."

ㅤ"근데 그 때 왜 따먹니 마니 지랄했어?"

ㅤ"그건 그냥 친해지자고 농담한 건데?"

 

ㅤ와. 와아아아.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 형님은 친해지고 싶으면 그런 말도 막 하는 호색한이신가봐요. 아니 누가 그런 거 받아주냐? 그런 거 할리우드에서나 할 짓 아닌가? 배신감에 치가 떨리고 몸이 떨린다. 물론 김정수는 자기가 본투비 동성애자라고 고백한 적 없다. 남자를 좋아해 본 것도 아니었다. 다짜고짜 사귀자고 입술 들이미는 것 봐줬더니 돌아오는 건. 와... 진짜 미친새낀가? 하는 하극상 뿐이었다. 결국 정수도 누워있던 몸을 일으켰다.

 

ㅤ"뭐라고? 너 형한테 말이 심하다."

ㅤ"형... 진짜 미안한데 나는 형이 착하다는 생각 추호도 한 적 없어."

ㅤ"갑자기 그 말이 왜 나와?"

ㅤ"그냥 말해주고 싶어서."

 

ㅤ뭔데?

 

ㅤ이 씨발 내가 너한테 뭘 잘못했다고 이렇게 화내는데? 억울해서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그렁그렁해진 눈동자가 곽지석을 노려본다. 하지만 지석은 그런 것에 관심도 없다는 듯 제 화 식히기에 바빠보였다. 그런 걸 보자 내내 마음에 걸려있던 한 가지 의문점이 결국 터져버리는 것이다. 얜 날 좋아하기는 하나?

 

ㅤ".…..너 나 왜 만나냐?"

ㅤ"그거 참 고민해봐야 할 질문이네요."

 

ㅤ빈정거리는 말투에 결국 아슬아슬 명줄을 유지하던 이성이 끊겨버린다.

 

ㅤ"야. 씨발 됐다. 그만하자. 나 집에 갈래."

ㅤ"지금 간다고? 밤인데?"

ㅤ"갈 거야."

ㅤ"어 그래 가라."

ㅤ"그리고 헤어지자."

ㅤ “어어 그래. 잘가시게.”

 

ㅤ이 좆같은 새끼야. 너도 인성 나쁘기로는 나한테 안 꿀린다.

 

ㅤ한밤중에 옷 갈아입고 신발 꺾어 신은 김정수가 현관문이 부서져라 닫고 빌라 건물을 나섰다. 이 시간에 버스가 있을지도 모르겠고 알아보기도 귀찮았다. 따라서 안산까지 택시 타는 돈지랄을 했다. 사실 그저 꼬추새끼들끼리 손절한 사연에 가까웠지만 그래도 이별은 이별이었다. 흐어엉. 흐어어어엉. 거기까지 가는 내내 눈물 줄줄 흘리면서 곽지석 나쁜 새끼라고 아주 통곡을 했다. 기사님 김정수 인생에 여태 여자친구 밖에 없었거든요. 근데 왜 그랬는지 알겠어요. 남자는 다 개쓰레기 새끼들밖에 없어요. 저 다시는 남자 안 만납니다. 마침 기사님은 신실한 기독교 신자였고 동성간 연애가 인류에게 어떤 해악을 끼치는지 그 끔찍함에 대해 설파하셨다. 맞아요. 하나님 말이 맞아요. 남자는 절대 남자를 사랑할 수가 없게 설계된 인간이에요. 저 진짜 곽지석 안 좋아해요. 제가 다시 남자 만나면 뛰어내릴게요 진짜. 짙은 정신병의 기운에 기사님이 입을 다물어버리는 바람에 정수는 자취방에 도착할 때까지 외롭게 흐느낄 수밖에 없었다. 흐흐흐흑~~ 곽지석 죽어버려라~

 

 

ㅤ**

 

 

ㅤ그리고 뭐 어떻게 됐냐고? 별일이야 있었겄습니다. 사나이 울리는 게 사나이라는 것만 여실히 느꼈다. 내가 생각보다 지석이를 좋아했나. 일어나서 울고 밥 먹다가도 울고 선배들이 또 지랄하면 지석이 말이 생각나서 울었다. 지석을 만나는 동안 애인 특권으로 만든 공짜 도자기들은 안 보이는 곳에 숨겨놨다. 그래도 사회 생활 해봤고 어른이었다. 혼자 조금 앓다 보니까 결국에는 무뎌졌다. 때마침 자취방 계약도 끝나서 십분 거리의 투룸으로 이사했다. 안 그래도 관리비 내느라 등골 다 휘었는데 잘 됐다. 그리고 학교 다녔다. 이별 핑계로 휴학 때리기에는 너무나 만학도인 정수였다.

 

ㅤ정희야. 오빠 헤어졌다. 정신병 토로할 사람이 없어서 결국 혈육이라는 죄로 시달리던 정희에게로 화살이 돌아갔다. 아... 진짜? 지석 오빠 이제 진짜 나 안 보겠다. 그게 뭔 소리야? 그 오빠한테 세현이 소개해준 적 있었거든. ...세현이랑 사귀었었다고? 응. 아니 그럼 지도 게이 아니었던 거잖아??? 별 황당한 새끼를 다 보겠다. 인간관계라는 게 늘 그렇듯 눈에서 멀어지니까 좋았던 기억들은 흐려졌고 결국에는 나쁜 앙금들만 남게 됐다. 그 개또라이 새끼. 그와중에 열일하시는 가온 작가의 이번 달 판매작은 꿈 에디션이었다. 별 달 구름 모양 도자기. 피드에 뜬 걸 보고 비웃어버렸다. 하하. 감정도 없는 싸이코 같은 놈이 감성적인 척 하는 게 너무 웃겨버렸다.

 

ㅤ"정수형이 이런 거 잘 하는데. 형이 이 파트 다 하는 거 어때요?"

ㅤ"아 하하하하"

 

ㅤ그리고 여전히 김정수를 또라이로 만드는 개같은 학교 새끼들. 다행히도 착하게 태어난 얼굴로 사람 좋게 웃어보이고 결국 걔 의도대로 모든 걸 떠맡게 됐다. 빡칠 때마다 쥐었던 담뱃갑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허옇게 다 찌그러지고 너덜너덜해져있었다. 이럴 땐 항상 우리 톨이가 옆에 있었는데. 평균 수명보다 더 산 톨이는 정수가 잠든 새에 아주 편안하게 갔다. 그런 톨이를 계속 보려고 만들었던 도자기. 아 그 놈의 도자기!!! 집에 가서 다 깨버려야지. 그렇게까지 과격한 행동 하지도 못하면서 생각으로는 지게차로 전국팔도 다 밀었다. 이렇듯 김정수는 여전한 미친놈으로 지냈다.

 

ㅤ너는 진짜 나쁜놈이야… 알아?

 

ㅤ그 미친놈. 사실 매일 밤 유튜브로 이별에 관한 숏드라마를 본다.

 

ㅤ그 구절이 마음을 울려서 5초씩 돌려가면서 계속 다시 들었다. 흑흑흑 나쁜놈. 그렇게 앉아있는 게 웃기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건 생소했다. 이전 연애에서는 대부분 정수가 나쁜놈이었다. 일평생을 스스로가 멋진 남자라는 생각에 매몰된 채 살았다. 따라서 지켜줘야 할 작고 소중한 애인들을 대하는 방식은 일관적이었다. 태생적인 정신병을 숨기지는 않되 어떤 사연으로 처울고 있는 건지는 꽁꽁 숨겼다. 가오 떨어지니까.

 

ㅤ[아니, 뭐가 힘들어. 누나 얼굴 보면 하나도 안 힘들지 ㅎㅎ]

ㅤ[장하다 김정수!]

ㅤ[내 걱정은 마. 나 상남자 김정수잖아 :)]

 

ㅤ그렇게 잘 해낸 줄 알았건만 결국 끝은 매몰찬 이별통보 뿐이었다. 정수야 너는 그러면 네가 멀쩡해보일 줄 아니. 말 안 할 거면 정신병 있는 티라도 내질 말든가. 내가 사람이랑 사귀는지 챗지피티랑 사귀는지 모르겠다. 착하고 잘생겨서 정수가 좋다던 그들은 그렇게 떠나갔다. 그 때마다 들여다보러 와 줬던 정희는 네가 여자 사귀는 건 여혐이라는 폭언을 일삼았다. 죄없는 여자들 괴롭히지 말라고 했다. 그러다 지석이라는 천사를 알려줬다.

 

ㅤ솔직히 인정한다. 지석과 함께 하며 행복했다는 것을. 이렇게 깊은 부분까지 파고든 것은 곽지석이 처음이었다. 나 안 착한 거 안 것도 걔가 처음이었다. 나보다 더 피곤한 얼굴로 사는 인간도 걔가 처음이었다. 존나 좋아했구나. 아 근데 모르겠다. 그 새끼는 너무 잘나서 택시비 한바가지 내고 안산 내려왔던 그 날 나의 모든 걸 정리했을 게 분명했다. 생각하다 보면 결국은 난 아메리카노 못 마시는데 작업실에 아메리카노만 구비해뒀던 것까지도 서러워져서 눈물이 났다. 살아있나 들여다 보러 온 정희가 한심한 얼굴로 엉덩이를 걷어 찼다. 노망났냐… 왜 말을 그렇게 하냐고 정희랑도 싸웠다. 그런 후유증을 열심히 견뎌내는 2학기였다.

 

 

ㅤ**

 

 

ㅤ줬다 뺏는 게 제일 나쁘다. 음식에서도 연애에서도 해당된다 주장하는 지론이었다. 하지만 이제 내게 있었던 게 뭔지 잘 기억도 나지 않았다. 곽지석은 정말 연락도 안 했다. 염탐계로 훔쳐본 가온 사장님께서는 [꿈 에디션 키링 모두 발송 완료되었습니다] 스토리나 올리고 자빠지셨다. 너무한 새끼. 잘 살지 말아라. 나를 버린 남자에게는 불행만이 따를지어다.

 

ㅤ정수는 과 행사에 잘 가지 않는다. 농담식으로 나이 얘기하는 것에 이젠 웃음도 안 나오고 어린애들이랑 술 마시기도 싫다. 그러나 개강한지 일주일 뒤에 치러진 개강파티에 참석했다. 어르신이 웬일이냐며 자리를 내어주길래 그냥 앉아서 술을 줄창 마셨다. 학생회비 낸 거 뽕이나 뽑자는 심보였다. 술버릇이 고운 편은 아니라서 안 친한 사람들이랑 있을 땐 술 잘 안 마시지만 그 땐 뭐가 그리도 헛헛했는지 그랬다. 따라서 만취는 아니지만 기분이 약간 떠 있었다. 곽지석 잊었다. 오늘이야말로 도자기 다 버릴 거다. 그러니까 그런 결심까지 했다.

 

ㅤ치킨집에서 집 가는 길 사이에는 전에 살던 오피스텔이 있었다. 익숙한 건물이 보이자 자연스럽게 쳐다보게 됐다. 기분 안 좋을 때마다 저 앞에 퀭하게 주저 앉아서 바람 쐬면서 핸드폰하고는 했었다. 집에 있으면 더 땅굴 파게 되니까 그랬었지. 딱 저 사람처럼... 아무 것도 안 하고 주저앉아서 멍때리고 있는 괴상한 인간. 어라라 근데 저 사람 어딘가 익숙한데? 사실 그렇게 생각하자마자 알아봤다. 곽지석이다. 근데 여기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이니까 술 마셔서 환각을 보는 건지부터 고민하게 됐다. 정수가 멈춰 서자 고개를 들어올린 지석이 벌떡 일어났다. 형.

 

ㅤ"어... 어어. 안녕?"

ㅤ"왜 집에 잘 안 들어와?"

ㅤ"응? 여기 우리 집 아닌데?"

 

ㅤ나 이사했어. 쩌 쩌기로... 보이지도 않는 현 자취방이 있는 방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심각한 얼굴의 지석이 멍해보이는 얼굴을 하다가 그랬냐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왜 아무렇지 않게 대화 받아주고 있는 거지. 우리 그럴 사이 아닌데. 근데...... 왜 왔어? 아련하게 물으려는데 삑사리 나서 목소리가 이상해졌다. 신경 안 쓰는 척 하려고 바닥만 쳐다봤다. 너도 나 없으니까 편했을 거 아니냐. 뭐하러 여기까지 왔냐. 운동화 앞코로 바닥을 툭툭 찼다. 표정 관리 해야 되는데 입꼬리가 자꾸 누가 당기는 것 같이 슬슬 올라갔다.

 

ㅤ솔직히 사람이 눈치란 게 있으면 안다. 다 끝난 사이에 여기까지 와서 나 기다렸다는 게 무슨 의민지. 저 자존심 강한 성격에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지도 알았다. 바보같이 그간 쌓아왔던 분노와 고민들이 한순간에 녹아내렸다. 곽지석은 천하제일의 씨발놈이며 인성 좆박았고 흙 팔아서 먹고 사는 사기꾼이라고 메모장에 5천자짜리 악플을 써놓은 게 무의미할 정도로. 역시 지석은 정수를 잡으러 온 모양인지 답지 않게 아련한 눈을 떴다. 드럽게 느끼하게 생겼네. 그런데 더럽게 잘생기기도 했다.

 

ㅤ"대답하려고."

ㅤ"뭘?"

ㅤ"형이 물어봤잖아 형 왜 만나냐고."

ㅤ"야 다 지난 얘기를..."

ㅤ"나 그냥 형 이뻐서 만난 거 같애."

 

ㅤshit

 

ㅤ야 너 돌았냐? 이건 뭐 수작질도 아니고 조롱에 가까운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해버렸다. 머리가 좀 짧아진 것 같은 지석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안 돌았는데? 눈알에 문제 생긴 건 아닌지 가까이 다가가서 뺨을 만졌다. 눈 아래를 비집어 까서 깨끗한 흰자까지 확인했는데 아무 이상 없다. 그럼 머리가 아픈가? 너 언제 차에 치였니? 막말에 하하하하 웃어버리는 곽지석은 정신이 나간 것 같아서 좀 무서웠다. 왜 형 이쁜데. 근데 형의 황홀한 외모만 취한 게 아니고 사실은 정수형.

 

ㅤ"그 때 무당이 있잖아."

ㅤ"어?"

ㅤ"나보고 나보다 미친 사람 만나래."

ㅤ"뭐?"

ㅤ"나랑 다시 만나주라. 내가 어딜 가서 형만한 사람을 찾겠어."

 

ㅤ야... 잠깐만. 이거 욕이지. 주먹을 쥐고 등을 퍽퍽 때리자 살이 아주 찰지게 감겨온다. 쩌억 쩌억. 솔직히 앙탈부리는 척 하면서 감정 좀 실었다. 하나 첨언하자면 김정수는 수능 끝나자마자 킥복싱 다닌 경력이 있다. 이쁜이의 연약한 주먹에 쳐맞으면서 지석이 컥 하고 밀려났다. 너 미워어. 잉잉. 형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잠깐만 살려주세요. 하지만 사나이 싸움에 봐주는 게 어딨나? 그동안 마음 고생 한 만큼 물리적으로 돌려줬다.

 

ㅤ미친 곽지석. 평생을 그래와서 혓바닥만 잘 놀리면 만사 해결되는 줄 알지. 내가 그렇게 쉬운 남자로 보이니. 그런데 사실은. 형이 안 착해서 미친놈이라서 너무 좋았다고. 사실은 지금도 좋다고 형 없으니까 제정신으로 못 살겠다고 네가 예뻐서 좋다고 말하는 전애인을 정수는 차버리는 법을 몰랐다. 그 정도로 매정할 줄도 모른다. 직접 해 봤으니까 알잖아. 빨간버스 타고 가기는 너무 늦었고 걔네 집까지 택시비는 너무 많이 나오고... 그러니까 정수는 제가 너무 착하게 태어난 탓이라고 생각하며 패배를 선언한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거지새끼마냥 꼬질꼬질해진 지석을 거두기로 했다. 허억허억허억. 거칠게 숨 몰아쉬고 있는 지석의 손을 쥐었다. 일단 우리 집으로 가든가... ......가도 돼?

 

 

ㅤ**

 

 

ㅤ“정수… 왜 더 안 좋은 집으로 온 거야?”

ㅤ“거기선 자꾸 네 생각나잖아…”

 

ㅤ사실 걍 돈 없어서였는데 죄책감 느끼라고 구라 좀 쳤다. 순식간에 말이 없어진 지석을 끌어안고 장난이라고 웃자 그제서야 풀린 얼굴로 정수를 안아온다. 으응 잠깐만 자기야 거기는 안 돼. 응. 아니 진짜 안 만지냐? 만지겠습니다. 그런 또 다른 시작이었다. 두 멘헤라 한남 예술충 동성애자 인간쓰레기 사회부적응자가 바지를 벗어 던졌다.

 

ㅤ남성에게 세우는 법을 몰랐던 곽지석은 마침내는 세웠다. 김정수는 제 정신병 불어넣을 창구를 되찾았다. 이제 관리비도 많이 안 나와서 에어컨 펑펑 틀 수 있는 투룸에서 한 이불을 덮었다. 정수가 울면서 떠난 뒤로 작업실 천장에서 물이 새고 발목 인대가 늘어나고 핸드폰 통신사가 해킹되는 사태를 목격했던 곽지석은 드디어 한숨 돌릴 수 있었다. 내가 김정수를 만나지 않는 것은 전국가적 재앙을 불러올 수 있는 거로구나. 나는 대의를 위해서 정수를 사랑해야만 하는 거구나.

 

ㅤ사실 그런 건 다 핑계고 정수가 보고 싶었다. 덩치는 산만해서 3인칭 써대고 내 앞에서 마음껏 정신병 부리고 나를 사랑해줄 김정수가 필요했다. 우리 정수는 자는 것도 귀엽구나. 남자한테 이런 말 하려니까 입술에서 털 나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했다. 정수가 기겁하며 밀어내는 바람에 차가운 바닥에서 취침했다.

 

ㅤ천지신명이 나를 감싸 안는 꿈을 꿨다. 선녀님은 신비롭고 인자하시다. 선녀님 저 결국은 찾았습니다. 딱 말씀하신 그대로의 제 지아비를요. 그러자 미미선녀 응답한다. 그래 너는 물 담을 그릇으로 태어난 애구나. 평생 뭔가를 담지 않으면 녹슬고 말라서 죽어버릴 운명. 그러니 네 품 속의 게이 남자친구에게 잘하려무나. 타고난 노동꾼인 지석은 꿈에서까지 물레를 돌리면서 알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렇게 모든 건 정해진대로.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제 잠옷 위로 흥건하게 침자국 남겨 놓은 덩어리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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