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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

ㅤ그러니까 동대문인지 남대문인지 하는 떡볶이 가게를 들어간 건 순전히 우연이었어. 배는 고픈데 주변에 맛있는 냄새가 나는 곳이라곤 거기 뿐이라. 나는 착륙한 지 서른 네시간째였고, 아무것도 못 먹었고, 조금 꼬질꼬질했고. 분명 여기선 이 화폐를 쓴다고 했는데 이 구멍 뚫린 납작한 금속 덩이를 받아주는 데라곤 없는 거야. 이동할 때 시간 계산을 잘못 했나 봐. 어쩐지 도착 시간이 다르더라니. 어쨌든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떠돌다가 더 이상 안 되겠다 싶어 들어간 곳에 앉아있던 형을 보고 깜짝 놀랐어. 새빨간 손가락을 먹는 줄 알았거든. 으악 하고 소리를 질렀더니 눈 동그랗게 뜨고 끔뻑거리는 표정이 너무 순진무구해서 더 공포스러웠어. 지구는 문명인들이 산댔는데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식인이라니. 뒷걸음질 치다 테이블에 걸리는 바람에 배고파서 힘 없는 몸뚱이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는데, 식인종이 아까보다 눈을 더 크게 뜨고는 일어나 막 다가오는 거야. 엄마, 나 이렇게 가는구나. 눈 질끈 감았는데, 괜찮아요? 익숙한 언어가 들렸어. 오기 전에 미리 이식한 조선어. 아니, 시대가 변했으니 한국어라고 해야지, 참. 그게 형과의 첫 만남이었어. 새빨간 손가락이 아니라 떡볶이를 두 개씩 집어먹는 형을 신기하게 구경했고, 형은 그러다 내 입에도 하나 쏙 넣어줬었지. 주린 배에 뭔들 맛이 없었겠냐마는 그게 그렇게 맛있었어. 이후로 지구에 많은 음식들을 먹어봤지만, 단연 그때 그 떡볶이가 가장 맛있을 정도야. 근데 이상하게 나 혼자 먹을 땐 그 맛이 아니더라. 내가 형에게 반하지 않았어도 그랬을까? 그랬다면, 우린 지금쯤 어떻게 됐을까?

 

ㅤ우리 행성엔 '이름'이 없어. 행성에 붙은 이름뿐 아니라 이름이라는 개념이 없지. 우린 대화를 하지 않거든. 그러니 존재에 이름을 붙일 필요도 없었던 거야. 성경의 아담과 하와처럼 눈을 뜨면 보이는 걸 먹고 자유로이 있을 뿐. 우리는 태초의 인간처럼 늙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고, 언제인지도 모르는 순간부터 영원히 존재해. 고요 속에서 그 누구와도 맞닿지 않고 어느 것도 소유하지 않아. 이렇게 활발한 사회에 살아온 형은 잘 상상이 안 되겠지? 그렇지만 저게 정말 전부야. 그렇다고 지루하진 않아. 권태조차 느끼지 않으니까. 그곳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앉아 쉴 나무 그늘까지 모든 게 있지만 그 무엇도 의미를 갖지 못해. 결국 아무 것도 없는 셈이지. 그래서 나는 그곳을 떠난 거야. 거기선 뭐든 할 수 있지만 아무 것도 이룰 수 없고, 나는 무엇인가 되고 싶었거든.

 

ㅤ착륙은 매우 순조로웠어. 시간대 설정이 조금 틀렸다는 것만 빼면. 그래도 다행히 많이 차이는 안 나서, 시공 괴리에 형체가 깨지지도 않았고 비교적 멀쩡하게 도착했지. 지구인의 인체란 거 상당히 정교하더라. 구현하는 데 애먹었어. 이 정교한 걸 뱃속으로 키워 낳는다니, 지구인은 참 신기하고 대단해. 하긴, 그렇게 대단하니까 이렇게 무수히 많은 의미들을 창조하고 사는 거겠지? 형이 그린 기린 그림처럼 말이야. 기린, 그건 우리 행성에 있는 그 어떤 것보다 이상하게 생겼어. 몸통이나 다리면 몰라, 목이 그렇게 길다니. 목은 머리와 몸통을 이어줄 뿐인데 왜 그렇게 길지? 그 기다란 목으로 떡볶이를 먹는다면 식도에 걸려서 소화되는 데 열흘은 걸리겠다 생각했어. 그때 나는 형이 상상으로 그린 줄 알고 막 웃었는데, 실제 기린 사진을 보고 입이 떡 벌어진 나를 보고 형이 더 크게 웃었었지. 처음엔 이상하다 생각했지만, 사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형의 그림은 그 기린 그림이야. 나를 만나고 처음 그려준 거니까. 언젠가 내게 속삭인 말은 아직도 내 귀를 간지럽혀. 그거 알아? 기린은 동성애가 흔하대. 우리가 기린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ㅤ아차, 기린 그림 이야기 전에 내가 여기 왜 왔는지부터 말했어야 하는데. 나는 여기에 의미를 찾으러 왔어. 존재의 의미. 이곳 생물들은 전부 저마다의 의미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더라. 가끔, 아니 꽤 자주, 의미를 찾지 못했거나 잃어버린 사람들은 스스로 삶을 포기하기도 하고. 처음 만났을 때의 형도 그런 상태였지. 겨우 붙잡고 있던 그림을 놓기 직전이었으니까. 날 처음 집에 데려오고서, 형은 내게 현관 옆 작은 방에는 들어가지 말라고 했어. 거긴 정리가 안 돼서 지저분하다고. 고개는 끄덕였지만 갈수록 궁금증은 커져만 갔어. 형은 평소에는 그곳이 없는 것처럼 굴다가, 잠시 딴 생각을 할 때면 작은 방 문을 멍하니 보고 있었으니까. 저 방, 구경해도 돼? 어느 날 호기심을 못 참고 묻자 형은 뜸을 들이다가 그러라고 했어. 난 신나서 얼른 달려가 문을 열었고, 그 안에는…

ㅤ색색의 그림들이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어. 갖가지 식물 그림이, 마치 작은 수목원에 온 것처럼 빼곡히. 넋을 놓고 구경하는 내 뒤로 형이 다가왔어. 나는 그림에서 눈도 떼지 못하고 물었어. 이 그림들 전부 직접 그린 거야? 대단하다. 나도 나중에 그림 그리는 거 구경하고 싶어. 대답이 없기에 돌아보니 형은 곤란한 웃음을 짓고 있었어. 그건 어려울 것 같아. 이제 그림 같은 거, 그만두려고. 이렇게나 잘 그리는데 왜? 내 아쉬운 표정을 보고 형은 씁쓸하게 웃었어. 이젠 그려야 할 게 없거든. 그럼 그리고 싶은 걸 그리면 되지. 글쎄, 그런 것도 없는걸. 말은 그렇게 했지만 텅 빈 캔버스를 보는 눈빛은 전혀 그래보이지 않았어. 형은 잠깐의 고민 끝에 붓을 들고 그랬지. 그럼, 마지막으로 네게 줄 그림을 그려줄게.

ㅤ뜻밖에도 그게 형에게 무슨 전환점이 된 걸까. 이제까지 그린 싱그러운 초록과는 달리 짙은 이끼 색의 배경, 그 가운데 기다란 목의 창백한 기린. 불과 몇 시간 만에 완성된 그림을 두고 형의 표정은 조금 달라져 있었어. 내가 작은 방 문을 다시 열었을 때, 형의 얼굴을 보고 직감했지. 형은 그림을 그만두지 않을 거라고. 형은 그래서 나를 좋아한다고 했어. 내가 형의 의미를 되찾아줘서. 정작 나는 아직 의미를 못 찾았는데 말이야. 그런데, 좋아한다는 게 뭐지?

ㅤ어쨌든 형은 나를 만나고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바빠졌어. 나는 매일 형을 기다리면서 작은 방에서 그림을 구경했어. 형은 매일 같은 걸 보면 질리지 않냐고 했지만, 전혀. 오늘은 여기 잎사귀가 찬란하고, 내일은 저기 꽃눈이 반짝였는걸. 그러고 보니 형은 꽃도 풀도 나무도 그리는데, 동물은 내게 그려준 기린이 처음이었더라. 왜 하필 기린이었어? 물었더니 형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말했지. 너 처음 본 날, 내가 떡볶이 입에 넣어 줄 때 머리 위에 두 개의 뿔이 잠깐 보였거든. 그게 꼭 기린 같아서. 머리에 뿔. 그건 산소감지기라는 부위였는데, 산소가 충분한 지구에선 필요 없어서 넣어두고 지냈어. 뇌랑 바로 연결돼 있어서 기분에 따라 움직이기도 한다니까 형은 신기해했지. 다시 꺼내어 보여주니 만져봐도 되냐며 호기심에 가득 찬 얼굴이 돼서 그러라고 했어. 촉각이 발달한 곳이 아니라서 별 느낌은 없지만, 어쩐지 심장이 두근두근거렸어. 사실은, 이건 좀 부끄러운데, 혼자 있을 때도 그때가 생각이 나서 형이 보고 싶을 때마다 괜히 꺼내서 만지고 있기도 했어. 이런 이상한 기분은 처음이야. 이게 뭐지? 자꾸 마음이 안달을 해. 보고 싶어서. 닿고 싶어서. 형이 돌아오면 얼른 달려가 끌어안았어. 그러면 가슴께가 막 간지럽고 이상해. 형은 잠잠히 듣더니 내 손을 꼭 잡고 내 볼에 입을 맞췄어. 그게 바로 좋아한다는 거야.

 

 

ㅤ존재의 의미라는 건 어떻게 갖는 걸까. 가져도 봤고, 잃어도 봤고, 되찾아도 본 형은 어쩌면 알고 있을까. 노트에 낙서하는 둥글둥글한 손가락을 보며 고민하던 중이었어. 무슨 생각해? 때마침 날아든 형의 물음에 말문이 막혔어. 음, 이걸 어떻게 말할까. 한마디로 설명하긴 어려운데.

ㅤ나한텐 어떤 의미가 있을까?

ㅤ의미?

ㅤ우주의 모든 것은 그저 존재할 뿐이지, 어떤 의미도 없어. 그런데 유독 이 지구에는 의미가 넘쳐나. 말이나 행동에도, 삶에도, 존재 자체에도. 스스로 만들거나, 어딘가에서 찾거나, 누군가에게 부여받기도 하면서. 이상한 곳이야. 아마, '이름'을 발명한 이가 그 첫 시작이었겠지?

ㅤ형은 내 말을 듣고는 한참 생각하더니 내게 말했어.

ㅤ너도 이름 지어줄까?

 

ㅤ형은 김정수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어. 김은 그의 가족으로부터 물려받은 성씨, 형 개인을 나타내는 이름은 정수. 가족이란 건 인간들에게 커다란 의미를 가지나 봐. 대부분 성씨라는 가족의 이름을 제 이름과 붙여 쓰더라? 형은 시큰둥하게 답했어. 그냥 형식적인 거야. 가족도 가족 나름이거든. 네 이름이나 골라 봐. 나는 이게 제일 마음에 드는데. 어쩐지 말을 돌리는 것 같았지만 굳이 더 캐묻지 않았어. 형이 좋은 게 좋으니까. 형이 지어준 이름 후보 중 나는 '지석'을 골랐어. 형이 나와 가장 어울린다고 하기도 했고, 정수와 첫 글자가 똑같아서 마음에 들었거든.

ㅤ지석아.

ㅤ형이 처음으로 나를 불렀어. 나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대답했어. 응, 정수야.

ㅤ형의 이름을 부른 건 그때뿐이었어. 나는 형의 이름도 좋아했지만 부를 땐 형이라는 호칭이 더 마음에 들었거든. 정수는 누구나 형을 부를 때 쓰는 이름이라면, 내가 형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우리의 관계까지 포함된 거잖아. 나는 뭐든 의미가 더해지는 게 좋아. 형은 그대로 나를 지석이라 부르지만 어차피 나를 부르는 건 형 뿐이었으니까 그건 그것대로 좋았어.

 

ㅤ그리고 나는 그때쯤 내 몸이 이상해졌다는 걸 느꼈어. 기린보다 더? 응. 기린보다 더.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데. 내 몸에도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고 해야 하나. 머리카락이 자라. 손톱도. 시력이 조금 떨어졌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달랐어. 내 몸의 세포가 끊임없이 죽고 새로 태어나고 있어. 그러니까,

ㅤ나는 늙어가고 있었어.

ㅤ이곳에선 모두가 노화를 겪지만 우리 행성에선 그 누구도 경험하지 않는 일이야. 처음엔 외형만 대충 따라 했던 신체가 정말 인간의 몸이 되어가고 있었어. 내가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알겠어? 내 시간이 유한해졌다니, 언젠가는 존재하지 않게 된다니. 말도 안 돼. 이건 분명 지구에 있어서 그런 거야. 내 차원이 이곳에 갇혀버리면, 그래서 우리 행성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면 나는 영락없이 언젠가 죽게 될 거야.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두려움은 커져만 갔어. 더 늦게 전에 당장 돌아가야 했고, 그러려 했어.

ㅤ… 형이 붙잡지만 않았어도.

ㅤ발끝부터 일그러지며 사라져가는 내게 다급한 손길이 뻗쳤어. 깜짝 놀라는 그 얼굴을 보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리더라. 그리고 깨달았어. 나는 형을 두고 어디도 못 간다는 걸. 이동을 준비하느라 희미해져 가던 몸은 다시 또렷하게 돌아왔어. 형은 안심이 됐는지 그제야 눈물을 보였지. 너 다시는 못 보는 줄 알았어.

ㅤ이불 속에 들어가 꼼짝 않고 하루를 꼬박 보냈어. 형은 그런 나를 섣불리 위로하지도, 다그치지도 않고 가만히 옆에 있어 줬어. 스물다섯시간 만에 퉁퉁 부은 얼굴로 이불 속에서 나왔어. 형은 내 얼굴을 보고 큭큭 웃다가 나를 꼭 안아주었어. 아무 말 없이 사라지려 한 내게 아무 것도 묻지 않고. 나는 형 품에 안긴 채로 말했어. 내게도 시간이 흐르고 있어. 나도 죽을 수 있는 몸이 됐어. 어떡해? 형은 내 등을 다독이며 나를 달랬어. 흐르는 시간에 불안함을 느끼는 건 당연한 거야. 괜찮아. 너무 무서워하지 마. 내가 옆에 있을게. 속삭임은 다정했지만 사실 안심되지는 않았어. 나는 그 순간에도 나이 들어가고 있었으니까.

 

 

ㅤ내게 시간이 흐르게 된 이상 지구에 계속 있을 수는 없지만, 형의 얼굴을 보면 떠날 수가 없어서 나는 매일 몇 번씩 마음을 돌렸어. 한 번만 더 보고 가야지,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그게 며칠이 되고, 몇 달이 될 무렵 나는 문득 지구에는 정말 영생을 사는 이가 없는지 궁금해졌어. 행성의 크기가 크지는 않지만, 지구에는 우리 행성과는 비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인류가 살고 있으니까. 나는 조사를 시작했어. 영원, 영생, 그런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지만 정말 영원한 경우는 없었고, 대부분 단어를 남용한 경우였어. 수없이 많은 가짜 영원들 속에서 나는 진심어린 약속들을 겨우 찾아냈어. 그건 바로……

ㅤ나는 곧장 소파로 가 낮잠 자는 형을 깨우고 머리맡에 웅크려 앉아 말했어.

ㅤ형, 나랑 결혼할래?

ㅤ갑자기 결혼이라니

ㅤ형은 잠 덜 깬 얼굴로 눈을 비비며 몸을 일으켰어. 나는 희망과 확신에 차서 말했어. 결혼이란 거, 평생을 약속하고 영원히 함께한다던데. 나는 형이랑 헤어지지 않고 계속 함께하고 싶어. 형은 크게 하품을 하곤 나른한 목소리로 설명해줬어. 그건 서로를 배우자로 삼겠다는 것뿐이지, 영원이 정말 네가 생각하는 영원은 아니야. 도중에 안 맞으면 헤어질 수도 있고, 평생 함께하더라도 둘 중 누군가 죽기 전까지만이지. 뭐야, 그럼 별것도 아니네. 실망해선 형의 옆에 풀썩 주저앉아버렸어. 형은 내 어깨를 당겨 안고는 내 목덜미에 고개를 묻고 웅얼댔어.

ㅤ… 그래도 너랑 하고 싶다, 결혼.

 

ㅤ하면 되지.

 

ㅤ못 해. 우리나라에선 아직 동성혼이 불가능하거든.

 

ㅤ성별 같은 걸 따지다니, 그것 참 치사하네.

 

ㅤ… 그거 알아? 기린은 동성애가 흔하대. 우리가 기린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ㅤ뭐야, 그게. 바보 같아.

ㅤ결혼도 그런 거야. 터무니없는 약속이라도 하고 싶어지는 마음으로, 영원을 감히 입에 담는 거야.ㅤ

 

ㅤ그때 불현듯 깨달았어. 수많은 가짜 약속들 속에 숨겨진 진심 어린 염원이 있다는 걸. 이 필멸의 존재들은 영원이 불가능하단 걸 알고 있음에도, 간절히 바랄 만큼 그 마음이 소중했던 거야. 평생을 약속하는 누군가의 결혼식도, 기린이었으면 좋겠다는 형의 엉뚱한 말도, 작은 방을 가득 채운 꽃과 풀과 나무도, 무언가를 간절히 바란다는 건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구나. 존재의 의미가 되는구나.

아, 내 의미는 형이구나.

 

 

​​

* * *

 

 

ㅤ있잖아, 형. 좋아한다는 건 너무 어려운 감정이야. 분명 좋다는 말이 들어 있는데, 좋기만 하지는 않거든. 이를테면 처음 보는 여자와 마주 보며 웃고 있는 형을 봤을 때 느낌처럼.

ㅤ그날따라 형이 많이 늦었잖아. 평소라면 벌써 와서 저녁도 다 먹었을 시간이었는데. 가끔 작업이 잘 안 풀리면 늦기도 하니까 그날도 그런 줄 알았지. 그럴 때 형은 예민해지니까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려고 했는데, 배가 너무 고픈 거야. 혼자 먹기는 싫어서 형을 마중 나갈까 했어. 작업실을 오가는 길 쯤이야 이제 훤하고, 빨리 형을 보고 싶기도 하고. 현관을 열자 덥고 눅눅한 공기가 살에 달라붙었어. 날씨가 습해지면서 유독 물감 마르는 속도가 더뎌져서 작업이 힘들다고 했는데, 오늘도 습한 한숨을 많이 내쉬었겠구나 했어. 들어오는 길에 떡볶이를 먹자고 해야겠다. 기분이 나쁠 땐 맛있는 게 최고라고 형이 그랬잖아.

ㅤ그런데… 낯선 그 사람 앞에 있는 형은 전혀 예민하고 기분이 나쁜 상태가 아니더라. 오히려 즐거워 보이기까지 하는 얼굴이었어. 길고 곱슬거리는 머리에, 쌍꺼풀이 진하고 눈웃음이 귀여운 사람. 화기애애한 분위기. 흐린 날 대기에 옅게 퍼진 햇빛까지 모든 게 너무 완벽해 보이는 그림이었어. 그걸 한참 동안 멍청하게 쳐다보다가, 뒤돌아 정처 없이 걸었어. 이마와 등줄기를 타고 땀은 흐르고, 축 늘어지는게 몸인지 마음인지. 나오지 말걸. 에어컨 켜준 방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걸. 신발 끈이 풀린 것도 모르고 막 다니다가 끈을 밟아 넘어졌다가도 일어나서 걷고, 또 걸었어. 어디로 가는지 알 게 뭐야. 무작정 발을 내딛다가 그렇게 길을 잃었어. 알아, 집에 돌아가려면 형이 준 휴대폰으로 지도를 켜면 된다는 거. 그런데 그냥 미아가 되고 싶었어.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도, 형에게 가서 아는 척을 하고 싶지도 않아서. 나는 형을 좋아하는 거라며. 그런데 왜 형이 밉기도 할까. 좋은데 미울 수도 있는 거야? 아니, 좋아서 미울 수도 있는 거야? 사실 나 그 여자가 누군지 알아. 형이 부모님과 통화할 때 들어버렸거든. 결혼할 사람인 거지?

ㅤ그때 형을 처음 본 떡볶이 가게가 보이더라. 형은 기분이 좋아 보였으니까, 나 혼자 먹어도 되겠다. 하지만 혼자 먹는 떡볶이는 고추장 묻힌 밀가루 덩어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어. 목은 메이고 가슴은 답답하고 눈가는 뜨거워지는데 이게, 날씨가 더워서 그런가. 너무 더우면 땀이랑 눈물이 같이 나기도 하나? 울면서 떡볶이를 목구멍에 막 밀어 넣고 있는데, 가게 안으로 형이 뛰어 들어왔어. 머리도 셔츠도 땀에 다 젖어서 숨을 헐떡거리면서. 울고 있는 나를 보곤 놀라서 옆에 앉아 달랬어. 왜 그래. 왜 울어, 응? 나는 목이 턱 막혀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끅끅 숨만 겨우 삼켰어.

ㅤ집에 오는 내내 우린 아무 말도 안 했어. 절뚝이는 다리를 보고 형은 나를 업었고, 땀에 젖어 축축한 등판에 업혀서 나는 연신 훌쩍였어. 형은 이따금씩 한숨을 쉬었는데 그때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어. 집 앞에 다다라서야 형은 날 내려줬어. 앞서 들어가려는 형을 붙잡고 물었어.

ㅤ형, 나랑 우리 행성에 갈래?​

 

ㅤ형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되물었어. 우리 행성에 가자고. 나랑 영원히 사는 거야. 그날 본 장면 때문에 갑자기 물은 건 아니었어. 여기에 있는 한 형은 언젠가 죽을 테고, 나도 그럴 거야. 지구는 유한하니까. 우린 헤어질 수밖에 없는 거야. 나는 내가 사라지는 것도 두렵지만, 형이 사라지는 것도 두려워. 나름 긴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이었단 말이야. 근데,

ㅤ미안하지만 난 못 가.

 

ㅤ형은 어떻게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가 있었어? 왜? 내 옆에 있어 준다며. 다시 눈물이 날 것 같은 걸 꾹 참고 물었어. 그건 네가 여기 있을 때 얘기지, 내가 어떻게 널 따라가. 그리곤 또 내쉬는 한숨. 나는 더 못 참고 가장 궁금한 걸 따지듯 뱉어버렸어. 왜. 결혼해야 해서? 형은 눈이 동그래졌어.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나는 더 듣고 싶지 않아서 대답도 없이 집에 도망치듯 들어왔어. 마땅히 숨을 곳도 없어서 화장실에 틀어박혔는데, 아까 급히 입속에 욱여넣은 떡이 얹혔는지 명치가 답답해졌어. 이제 보니 아까 넘어져서 무릎도 팔꿈치도 까져서 피가 흐르고 있고, 속은 꽉 막혀서 토할 것 같고, 괴로워서 웅크리고 숨만 겨우 쉬었어. 곧이어 현관 소리가 들리더니 형이 화장실 문을 두드렸어. 네가 생각하는 거 아니야. 집에서 하도 고집을 부려서, 일단 만나서 제대로 거절하고 왔어. 미리 말 못해서 미안해. 문 너머로 형이 계속 나를 불렀어. 지석아, 문 좀 열어봐. 아이 달래듯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못 이기는 척 빼꼼히 연 문틈 새로 형의 눈동자가 날 보고 있었어. 나는 아마 영원히 형은 못 이길 거야. 날 보는 그 따뜻한 눈빛 하나에도 벌써 조금 풀려버린 걸.

 

ㅤ내 상처에 약을 발라주면서 형이 어릴 때 얘기를 해줬었잖아. 아직도 그때 형 표정이 다 기억나. 감정이 텅 비어버린 게, 꼭 우리 행성 사람들 같았어. 지금은 이렇게 알록달록한 형이 어떻게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었을까.

ㅤ*

 

ㅤ네가 온 행성이 어딘진 모르지만, 뭘 하든 자유롭게 살았던 너는 아마 상상도 못 할 거야. 우리 집은 내가 어릴 때부터 손가락 하나 움직이는 것조차 허락을 받아야 했어. 자수성가하신 할아버지가 롤모델이었던 아버지는 화장실 가는 시간까지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며 사셨고, 그 계획엔 아들인 내 양육도 포함돼있었으니까. 내가 유일하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그림 그리는 것뿐이었어. 그나마 해도 남부끄럽지 않을 취미로 조금 인정을 받았거든. 처음에 공부하기 싫어서 공책에 끄적이는 걸 들켰을 땐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줄 알았어. 근데 혼내진 않고 잠시 생각하시더니, 다음 날 온갖 화구가 내 방에 들어왔어. 공부엔 적성이 없는 것 같으니 차라리 그림이라도 그리라는 뜻이었을까. 뭐, 나는 신났지. 뭘 그릴까 고민하는데 마침 방 안에 화분이 눈에 들어왔어. 양손에 다 들어올 작은 화분이었는데, 문득 이 조그만 게 나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 이 넓은 세상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거라곤 흙 한 줌 겨우 붙들고 살아가는 거라는 게. 근데 식물은 뿌리박혀 그 자리에 있어도 제 할 일을 다하잖아. 영양분을 빨아들이고, 광합성을 하고, 중력을 거슬러 하늘로 자라나고. 나도 그러고 싶었어. 언젠간 아버지를 거스르고 내 가지를 뻗을 날이 오겠지, 언젠가는 나도 그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계속 그림을 그려왔는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 난 여전히 비겁하고 겁쟁이더라. 나는 중력을 거스르지 못해. 애써 변명해오던 삶이 사실 아무 소용도 없었단 걸 알고 나서, 붓을 내려놓으려고 했어.

ㅤ그때 네가 나타난 거야. 이상한 뿔을 달고. 다행히 나만 본 것 같길래 우선 집에 데려와 물었지. 네 정체가 뭐냐고. 그 뿔이 아니었다면 다른 행성에서 왔다는 말 같은 거 안 믿었을 거야. 그때만 해도 그냥 지루한 삶에 어쩌다 재밌는 일이 생겼구나, 그 뿐이었어. 어차피 또 그러다 말겠지. 그때 나는 네 말대로 삶의 의미를 잃었었으니까. 호기심도 즐거움도 전부 동이 나버려서, 전 지구를 통틀어 엄청난 만남에도 감흥이 없었지. 그런데 네가 작은 방 문을 열어본 날, 정말…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그림을 그렸어. 그 기린 말이야. 이제 정말 그림과도, 나와도 작별을 하려던 그 순간에. 오랜만에 붓질을 해나갈 때 기분은 뭐랄까, 뿌리를 뽑아내 다리를 얻은 기분이었어. 네가 나한테 준 건 그런 거야. 그런데 내가 어떻게 널 두고 다른 사람을 만나고 결혼을 해?

ㅤ형의 그 말이 어찌나 안심이 되던지. 형이 내 의미가 된 것처럼, 나도 형에게 무엇인가 되었구나. 혼자 남겨진 것만 같았던 외로움은 어느새 다 녹아내렸어. 내 기분이 풀린 게 보였는지 형은 날 향해 두 팔을 벌렸고 나는 그 품에 와락 안겼어. 형은 내 등을 토닥이며 말을 이었어. 네가 오기 전부터, 결혼 얘기는 늘 나왔었어. 그동안 한 번도 싫단 말 한 적 없는데 네 덕분에 용기 내서 드디어 중력을 거스르고 온 거야. 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ㅤ그러니 이번엔 네가 내 옆에 남아주면 안 돼? 오늘 너 없어진 줄 알고 내가 얼마나… 아니, 그런 건 다 됐고.

ㅤ...

ㅤ가지마, 지석아. 나랑 여기 같이 있자.

 

ㅤ...

 

ㅤ꼭 영원해야 해? 우리한테 주어진 시간은 생각보다 많아. 앞으로 몇십 년은 더 남았는걸.

 

ㅤ나를 바라보는 눈빛엔 간절함이 담겨 있었어. 쉽게 답을 하지 못하니 형도 초조해졌나 봐. 대체 왜 가려는 거야. 거기에 뭐가 있는데? 뭘 원해? 나로는 안 돼?

ㅤ… 아니, 형이면 충분해.

 

ㅤ내 답에 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나를 다시 품에 안았어.

 

 

 

 

ㅤ형은 어느 날 사진기를 들고 왔어. 셔터를 누르면 필름을 뱉어내는 폴라로이드 사진기. 중고로 사 왔다며 몇장 얻어온 새 필름을 끼워두곤 나를 한 장,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구름 동동 뜬 새파란 하늘을 한 장 찍었어. 한 명 밖에 못 찍는 거야? 하고 물었더니 날 끌어다 옆에 끼우고선 팔을 쭉 뻗어 셔터를 눌렀어. 준비도 없이 찍어서 표정이 이상하게 나왔는데, 다시 찍자고 했더니 필름이 다 떨어졌다는 거야. 고작 세 장 만에? 황당하지만 뭐, 다음에 필름을 사 오면 더 찍기로 했어. 사진은 냉장고에 붙였어. 나와 하늘, 그리고 우리를 담은 사진. 순간이 멈춰버린 채 영원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 사진처럼 말이야. 나는 역시, 형이랑 조금 더 오래 함께 하고 싶어. 우릴 지나쳐가는 시간을 붙잡고 싶어.

ㅤ늘 그랬듯 형은 작업을 하러 갔고, 나는 작은 방에 앉아 형의 수목원에 파묻혔어. 한동안 못 볼 테니 눈에 하나라도 더 담아야지. 이게 무슨 소리냐고? 나는 우리 행성에 다녀올 거야. 형도 나와 함께 있고 싶어 한다면, 더더욱 지구인의 짧은 수명 끝에 헤어질 수는 없어. 내가 떠나온 곳에는, 거기선 아무 의미도 없을 모든 우주의 진리가 있어. 거기라면 왜 지구에서만 시간이 흐르는지 알 수 있을 테고, 우리는 영원히 살 수도 있을 거야.

ㅤ나는 몰래 잠시 떠나 있을 준비를 시작했어. 형의 예전 그림들과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린 그림까지 눈에 담고, 형에게 남길 편지를 썼어. 그리고 태양과 지구의 공전주기와 이곳의 좌표, 차원을 넘을 때 생길 편차를 계산했어. 단 하나의 실수도 있어선 안 돼. 처음 왔을 때처럼 예상 지점에서 시간을 한참 건너뛰어 버리면, 형을 다시는 만날 수 없을 테니까.

 

ㅤ그날 밤 자는 형에게 입을 맞추고, 기척에 움찔이는 형이 깰까 봐 조심스레 침대를 빠져나왔어. 눈이 어둠에 잠겨서 형의 눈코입이 다 보이도록 한참을 바라보았어. 둥그런 뺨을, 콧등을, 눈으로 쓰다듬다가 더 있으면 못 갈 것 같아 이만 몸을 일으켰어.

ㅤ잠시만 다녀올게. 

 

ㅤ우리는 더 긴 시간을 위해 잠깐 이별하는 것뿐이야.

 

ㅤ막상 가려니까 조금 눈물이 났는데, 곧 다시 볼 테니 꾹 삼켜냈어. 형은 무슨 꿈을 꾸고 있었을까. 어느새 고여 있는 눈물을 닦아주면 깰까 봐, 나는 내밀었던 손을 조용히 거뒀어.

 

ㅤ이상해.

 

ㅤ우리 행성에 도착했는데, 여전히 내게만 시간이 흐르는 것 같아. 이 행성에 다른 것들은 그대로야. 식물은 죽지도 더 자라지도 않고, 사람들도 익히 아는 얼굴들이야. (물론 그걸 알아볼 수 있는 건 나 뿐이야. 이곳에서 의미를 가지는 건 지금 나밖에 없으니까.) 그런데 나는 피부가 마르고, 노폐물이 쌓이고, 머리카락과 손톱이 길어지고 있어. 돌아왔는데, 더 이상 지구가 아닌데. 왜 시간이 흐르는 걸까. 왜 나는 여전히 늙어가고 있을까. 내 시간이 유한해진 이유가 행성이 아니었던 걸까. 나는 이곳에 존재하는 온갖 진리를 동원해 이유를 찾았어. 내가 이곳을 찾아온 목적, 이 행성에 시간이 흐르지 않는 이유를. 그리고 기어코 그걸 찾아냈을 때 나는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어. 존재는 유한하기에 의미를 지니는 거였어. 내 시간이 유한해진 것도 의미를 찾은 존재에게 수명이 생긴 것 뿐이야. 행성이 문제가 아니었어.

 

ㅤ나는 서둘러 지구로 향했어. 시간이 없어.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거라면, 하루라도, 단 1초라도 형을 더 봐야만 해. 이미 우리 행성에서도 꽤 시간을 썼으니 지구에선 얼마나 흘렀는지 몰라. 나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이동을 시도했어.

ㅤ2035년. 37.33.**.** : 126.58.**.** .

 

ㅤ안 돼. 시간 역행에 제한이 걸렸어. 이 행성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했나 봐. 여기선 시간이 흐르지 않으니 지구와는 또 괴리가… 안 돼, 안 돼.

ㅤ2040년. 불가. 2045년. 불가. 2055년 …

ㅤ20×5년. 성공.

ㅤ겨우 이동 식을 성립시키고, 일그러져 흩어지는 몸의 입자를 불안한 마음으로 바라보았어. 그게 고향에서의 마지막 기억이야. 나는 형을 만날 수 있을까. 만나도… 알아볼 수 있을까. 몸을 따라 걱정도, 생각도 흩어져가. 나는 지구에서 다시 재구성될 거야. 부디 그게 형의 품속이면 좋겠어.

​​

* * *

ㅤ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형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어. 그 사이 형은 꽤 유명해져 있어서. 인공지능의 발달에도 예술은 용케 살아남았고, 거기엔 형도 한자리 꿰차고 있더라. 인공지능은 어느새 사실화는 물론 추상화까지 그려내고 자기만의 의미를 부여하기까지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인공지능의 의미였고 사람은 사람의 이야기를 찾기 마련이니까. 형은 스토리텔링에 꽤 능했어. 형의 전시관을 안내받으면서 이걸 정말 형이 다 생각한 게 맞을까, 살짝 의심이 들 정도로. 미안. 형이 멋지다고는 생각했지만, 이렇게 인류 역사에 남을 정도인 줄은 사실 몰랐어. 난 그림이라곤 형의 그림밖에 모르니까.

 

ㅤ형은 이미 세상을 떠난 뒤였어. 조금만 더 기다려주지, 생각보다 일찍 갔더라. 살던 동네에는 형을 기리는 특별전시관이 세워졌고, 방문객도 꽤 많았어. 형의 전시관은 총 3관으로 이루어졌어. 사실적으로 담아낸 식물 그림이 1관, 우주를 담아낸 듯 수많은 항성과 행성, 위성들이 자리한 2관. 나와 함께 있던 시간, 내게 절대 보여주지 않던 새 작업물들은 2관에 전부 있었어. 작품 해설엔 형의 자아가 마침내 중력을 거슬러 우주에 닿았다고 하던데, 글쎄. 그냥 내 행성을 찾아 그리고 싶었던 거 아니야? 하지만 결국 그 수많은 별들 사이에 내 고향은 찾지 못했어. 어찌 보면 당연하지. 나는 차원을 넘어야 할 만큼 멀리서 왔으니까, 이곳의 사람들에게 관측되기엔 무리가 있었을 테니. 나는 찬찬히 발걸음을 옮기며 형의 붓 자국을 눈으로 따라갔어. 이걸 그리는 동안 형의 눈은 여기 있는 그 어떤 별보다 빛이 났을 텐데. 못 본 게 아쉽네.

 

ㅤ그리고… 3관.

 

ㅤ들어서자마자 마주한 그림들 사이에서 나는 무너져내렸어. 왜,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나를 언제까지 그리워한 거야. 그 곳은 온통 기린 그림들 뿐이었어. 넓은 전시관 벽면을 가득 채울 만큼 커다란 기린, 기둥에 걸린 작은 기린. 수많은 기린들 사이 한 중간에 자리한 이끼 색 배경의 창백한 것, 내게 선물했던, 오로지 그것만이 정면으로 나를 보고 있었어. 도슨트는 내가 눈물을 흘리자 잠시 설명을 멈췄어. 그가 손수건을 건네줬는데, 한쪽 모서리에 기린 모양 자수가 놓여 있었어. 이 전시관의 기념품인가 봐. 실없이 웃음이 나더라. 기린은 형의 대표작이 됐는데, 내게 작품 해설을 해주던 이 사람도, 이 곳을 지나간 사람들 전부 이 기린들이 갑자기 어디서 왔는지 모른다는 게. 형의 3관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쏟아졌지만, 수목원을 넘어 정글 같은 그림에서 우주공간으로 떠난 형이 왜 갑자기 기린을 미친 듯이 그려댔는지 아무도 똑바로 답을 내놓지 못했어. 하긴 나라고 형의 마음을 다 알까. 그냥 내가 많이 보고 싶었나, 추측할 뿐.

 

ㅤ체험관에서 그림을 그리려는데 갑자기 형 얼굴이 생각 안 나는 거야. 같이 찍어둔 사진이라곤 딱 한 장인데, 그거 형 줬었잖아. 내가 더 나중까지 남겨질 줄 알았다면 내가 가질걸. 아니, 아니다. 형도 내가 없는 동안 날 기다렸을지도 모르니까. 그 동안 내 얼굴 닳고 닳도록 보고 싶었을지도 모르니까. 어땠어. 나 보고 싶었어? 내 사진에 입 맞췄어? 사진 위로 눈물을 흘리진 않았어? 나라면 그랬을 텐데. 그래도 형은 그렇게 많이 아프진 않았기를 바라. 우리 마지막에 흘린 눈물로 나와의 슬픔도 끝이었기를, 이 수많은 기린 사이에서 홀로 외롭지 않았기를 바라.

 

ㅤ나는 형처럼 예쁜 기린 그림도, 예쁜 형 얼굴도 못 그리니까, 형이 좋아하는 떡볶이라도 그려야겠다. 우리를 처음 만나게 해준 빨간색, 아니 주황색인가. 손가락에 힘이 없어서 붓을 툭 떨구는 바람에 캔버스 위에 긴 붓 자국이 붉게 남았어. 하하, 형이 좋아하겠다. 떡을 두 개, 세 개 한 번에 집지 않아도 기다란 떡볶이가 입 안에 가득 찰 테니.

 

ㅤ나더러 대체 뭘 원하냐고 그랬지. 글쎄, 나는 그냥 형이랑 떡볶이나 먹고 싶었어. 영영, 그게 얼마나 긴지도 모르고 영영. 영원히 닿지도 못할 영영. 형은 몰라도 나는 원래 거기 닿아야 했는데. 나는 형으로 이 생의 의미를 얻었고 또 잃었어. 그러니 내 죽음은 오롯이 형의 탓이야. 이렇게 말하면 형은 뭐라고 할까. 억울해할 형은 이미 없지만, 괜히 뾰로통해질 표정을 생각하니 웃음이 나네. 여기서 눈을 감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형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너무 오래 기다렸다고 날 잊어버리지는 않았겠지? 지구인인 형에게 그리 평범한 사건은 아니었을 텐데, 되도록이면 오래 기억해주라. 그리고 마중 나와 줘.

ㅤ나, 곧 가.

ㅤ......

ㅤ...

​내가 그린 기린 그림은 목이 긴 기린 그림이고
네가 그린 긴—떡볶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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