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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정폐기물 처리법
​벼락

ㅤ​#가정사

​​

ㅤ​마당 계근대에 올라선 나를 집게차의 집게가 가볍게 들어 올린다. 곧장 압축기에 들어선다. 표피가 터지고 검붉은 액체를 세차게 뿜으며 납작해진다. 이후 고철 전단기에 넣어진 육신의 뼈와 힘줄은 산산이 부서지고 다져진다. 고물의 후처리를 당하는 나를 내가 3자의 눈으로 바라본다. 모든 감각은 사실적이다가 거짓처럼 스러진다.

 

ㅤ​이 모든 건 꿈이다.

 

ㅤ​뒤숭숭한 꿈을 꾸고 나자 등이 축축했다. 얇은 커튼 너머로 어스름한 빛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손아귀가 축축했다. 현실에 발붙이지 못하고 잠시간 정신이 먼지처럼 부유했다. 그 찰나를 깨트린 건 익숙한 모닝콜이었다. 핸드폰이 잠투정하는 아이처럼 세차게 울기 시작했다. 출근할 때다.

 

ㅤ​이부자리를 정리하고 곧장 화장실로 들어섰다. 거울로 보이는 얼굴이 푸석하다. 어느새 길게 자란 앞머리가 눈을 찔렀다. 오늘은 꼭 잘라야지 싶다가 희번덕한 날붙이를 떠올리자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상상 속 이발에 열심이던 가위가 용도를 달리해 쇄골 근방을 꿰뚫는다. 폭력성 짙은 원인 미상의 공포는 계속해 이어졌다. 물을 틀고 양칫물을 뱉자, 배수구로 흘러 들어가는 물이 꼭 꿈속의 핏물 같다. 그 허상은 일종의 징표처럼 정신 곳곳에 끈덕이며 달라붙는다. 요 며칠 기운이 없었지만, 오늘은 특히 더했다. 그러나 외출을 피할 수 없다. 의식 너머 감정의 뭉텅이를 처박으며 찬물에 얼굴을 담갔다.

 

ㅤ​일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새벽녘만 되면 고물을 싣고 커다란 차체를 끌었다. 도로가 한산했다. 가업의 대를 잇겠다는 건 알량한 대의를 품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일련의 모든 과정이 자연스러웠다. 더 이상 기능하지 않아 버린 선풍기에서 구리를 캐는 게 재밌었다는 게 동기라면 동기였을까.

 

ㅤ​고물상에서 모든 절차의 첫째는 분해다. 배출된 쓰레기는 분해를 거쳐 재생 가능한 고물이 된다. 분류는 나중이다.

ㅤ​그러므로 나는 훌륭한 고물상의 자질을 갖췄다고 볼 수 있었다. 비교적 멀쩡한 자전거를 산산이 분해해 너덜너덜하게 만든 어린 나를 보고 기특하게 웃는 아버지의 얼굴은 지금도 선명하게 그릴 수 있다. 그런데 당장 일주일 전의 기억은 전생처럼 아득히 멀었다.

ㅤ​첫사랑과 형제가 된다.

ㅤ​할머니 손에 자라 어린 시절부터 상상을 초월하는 소재의 수많은 드라마를 봐왔다. 한때 성행하던 온갖 막장 드라마에서도 본 적 없는 일이다. 하지만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현실은 그보다 한참을 앞섰다.

ㅤ​지석이, 우리 정수랑 친했다며?

ㅤ​새어머니 되실 분 앞에서 씹던 밥을 뱉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텐데. 장담하기 어려웠다. 금방이라도 내가 가진 구멍들로 음식물이 쏟아질 것 같다.

ㅤ​다행일까. 상대의 눈을 마주하기가 밥을 넘기기보다 어렵다. 덕분에 꾸역꾸역 입안의 것을 삼켰다. 도둑질하듯 밥상 근처를 겨우 맴도는 시선으로 대상을 살핀다. 갈비찜을 떠서 자리 앞에 놓아주는 손이 김정수의 것과 똑 닮았다.

 

ㅤ​저절로 과거를 추억한다. 맺지 못한 말들이 입안에 침처럼 고였다. 살짝 높은 온기, 촉촉하고 조금 두툼한 양감. 그 손을 나는 매일 맞잡았다.

 

ㅤ​그뿐인가. 손가락을 얽고, 손바닥을 간지럽히고.

 

ㅤ​잘 지낼 수 있겠니?

 

ㅤ​그 손으로 서로의 것을 붙들고...

 

ㅤ​필요 이상 잘 지내던. 너무도 잘. 그래서 문제인.

 

ㅤ​물론이죠.

ㅤ​네.

 

ㅤ​누가 먼저랄 것 없이 내놓은 대답.

 

ㅤ​맞은편에 앉아 있던 서로의 부친과 모친이 그것이 썩 흡족한지 웃었다. 따라 웃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제대로 웃고 있는 게 맞는진 잘 모르겠다만. 옆눈으로 살핀 웃는 얼굴엔 심장이 발등에 떨어졌다.

 

ㅤ​죽고 싶었다.

 

ㅤ​현장에서도, 이제 와 다시 떠올려도 그랬다.

 

ㅤ​타고난 신경 줄이 가느다란지 자주 체했다. 심사가 뒤틀릴 때 하루 이틀 아무것도 못 먹는 일은 다반사였다. 하지만 그건 벌써 5년 전 얘기였다. 엊그제 직원들과 함께 먹은 백반을 전부 게우고 여태 공복이었다.

 

ㅤ​눈앞이 하얬다 깜깜하다를 반복했다. 금방이라도 땅바닥에 고꾸라질 것 같았다. 성인이 되고 제대 후 일을 시작하면서 고의로 식사를 이틀 이상 거른 적은 오랜만이었다. 이유는 너무나도 자명했다. 철없다 못해 미친 생각이지만 차라리 건강 이상 때문이었으면 할 정도로. 식중독 정도면 딱 좋겠다. 그 핑계로 점심 식사를 하라며 근처 밥집으로 직원들을 보냈다. 들이라고 해봤자 분류와 분해 작업을 도와주는 인원 하나씩 다 합쳐 둘이었지만. 평소 같으면 여러 번 권했겠지만 얼굴이 많이 안 좋았는지 순순히 수긍하며 사라졌다.

 

ㅤ​혼자가 되자 정처 없이 동네를 걸었다. 입안이 깔깔해 간식 봉지 하나를 까서 털어 넣었다. 책상 한편에 아무렇게나 놓인 걸 챙겨왔던 건데 오래되었나 보다. 생고무처럼 질긴 젤리에선 도무지 맛을 모르겠는 착향료 맛과 전 내가 났다. 뱉어버리면 될 텐데 무슨 고집인지 끝까지 씹어 삼켰다. 치아 구석구석은 물론 혀뿌리 가득 역겨운 맛이 감돌았다.

 

ㅤ​오후엔 비가 쏟아질 건지 구름 모양이 심상치 않았다. 아침 라디오에서 국지성 호우를 이야기하며 우산을 챙기란 당부를 들은 것도 같다. 가끔 사람의 뇌는 아주 사실적으로 가까운 미래를 보여주기도 한다. 쫄딱 비에 맞은 나의 모습. 더불어 곧 인생에 있어 파국에 가까운, 커다란 전환을 맞을 나를 연상하는 건 너무도 쉬운 일이었다.

 

ㅤ​아버지가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재작년부터 알았다. 언젠가 소갤 시켜주시겠거니 기다렸지만 먼저 청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것이 패착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어도 미리 알아야 했다.

 

ㅤ​그러나 알았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ㅤ​일찍이 돌아가신 어머니의 목소리는 더 이상 기억나지 않았다. 막연한 그리움보다 한 해가 지날수록 늙어가는 아버지에게 갖는 연민이 더 컸다. 어쭙잖은 마음들은 잘 세공된 유리였다. 난동을 부리고 강퍅한 비명을 지름과 동시에 아주 쉽게 부서지는. 불연성의 타지 않는 쓰레기. 하지만 그리 할 순 없지 않은가.

 

ㅤ​그래서 기만을 선택했다. 지나간 순정을 지나치게 고평가하지 말자고.

 

ㅤ​내 아버지의 연인, 그 새어머니의 자식이자 내 새로운 가족이 될 남자는 한때 내가 너무도 사랑하던 사람일 뿐이다.

ㅤ​하지만, 분명히 알고 있다.

​​

ㅤ​상식적으로... 그게 되겠냐?

ㅤ​돌부리를 걷어차고 가던 길을 몇 걸음 걷기 무섭게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비를 피할 새도 없이 넓적한 나무의 이파리가 휘청이며 젖어 들었다. 입고 있던 옷은 물론 단숨에 머릿속 두피까지 푹 젖었다. 빈 상가 유리창에 비친 모습이 가관이다. 누가 보면 미친 사람인가 보다 흉볼 정도의 몰골이다. 그러나 남이 어떻게 보든. 나는 근래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어떻게 김정수는 태연하게 웃을 수 있었지? 내가 궁금한 건 오직 그거였다.

ㅤ​하늘에서 퍼붓는 세찬 빗물은 금세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고요하게 웃음 짓던 말끔한 입꼬리. 기억이 재조립한 왜곡인가 싶다가도 아닐 것이란 확신이 들었다. 생각보다 나는 기억력이 좋았고 떠올려보면 김정수는 아닌 척 가장에 능했다. 나는 곧이곧대로 믿었고 과거 우리는 그래서 순식간에 걷잡을 수 없이 멀어졌다. 무도한 이별이었다.

ㅤ​다시 가까워지는 것도 마찬가지려나. 내리막길의 자전거 바퀴처럼 무서움을 모르고 가속이 붙었다. 일상의 모든 관심과 생각이 한 길로 흘렀다. 불가항력처럼.

ㅤ​그래서였다. 김정수를 보고도 한참이나 인지하지 못한 건. 모든 괴리로부터 솟아난 단 하나의 갈망이었으므로.

 

 

 

ㅤ​#김정수

ㅤ​지나간 순정.

 

ㅤ​김정수는 여전히 헤플 정도로 웃음 허들이 낮고 성정이 순하다. 달라진 건 우리의 처지와 흡연 여부 정도일까.

 

ㅤ​지나치게 조용한 골목에선 둔탁한 길고양이의 발소리와 생활 소음이 벌어졌다. 비 맞은 생쥐 꼴로 흡연을 위해 찾은 곳에서 김정수를 맞닥뜨렸다. 이후엔 궁지에 몰린 쥐처럼 절로 뒷걸음질 쳤다.

 

ㅤ​내 모습을 보며 슬며시 웃다가 곧 제자리로 돌아온 무표정. 더없이 냉담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김정수는 한 마디 건넸다.

 

ㅤ​“안 추워?”

 

ㅤ​대답하지 못했다.

 

ㅤ​일부러 무시한다고 생각했는지 김정수는 눈살을 조금 찌푸리다가 곧장 담배에 불을 붙였다. 얼굴을 가리는 연기에 표정이 불투명했다. 젖어서 더 길어진 앞머리는 눈가를 아프게 찔렀다. 잘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잘 됐다. 김정수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까. 현재 우리의 관계에 아무런 도움 되지 않는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ㅤ​컴컴한 사위, 한동안 불빛이 반짝이다 가느다란 연기를 피운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스파클라를 가지고 놀던 기억이 밀려든다. 그땐 파도치는 소리보다 우리 둘의 웃음소리가 더 컸다. 반면 8년 후 지금. 정적보다 고요한 침묵은 상념에 빠지지 않고선 못 배기게 했다.

 

ㅤ​그 언젠가는 수능이 막 끝난 열아홉의 겨울이었다. 혈기 왕성한 우리는 혹한을 뚫고 강릉에 갔다. 돈도 없고 차도 없는 학생 둘이 할 수 있는 일은 당연히 많지 않았다. 잠시간 보고 돌아온 이후 아랫목은 따뜻하나 웃풍이 도는 민박집에 틀어박혔다.

 

ㅤ​시끌벅적한 예능 프로그램을 틀어두고 처음으로 입을 맞췄다. 김정수의 손에 단단히 붙잡힌 턱은 키스가 끝난 후엔 얼얼할 정도였다. 허리와 등을 매만지던 손발이 긴장으로 저릿했다. 부드럽던 감촉, 처음 닿을 때 냉기가 돌던 온기. 다음 날까지도 턱에 은은하게 통증이 이어졌는데 그게 정말 기꺼웠다.

 

ㅤ​무형의 감각이 순식간에 들이닥쳤다. 윗입술보다 도톰한 김정수의 아랫입술. 주머니마다 들어있던 바세린과 립밤. 내 귀는 불쏘시개처럼 뜨거웠고 눈앞에 김정수의 보이는 살갗 모두가 빨갰다. 침으로 번들거리다 못해 퉁퉁 부은 입술을 마주 보며 방이 떠내려가라 웃었던 밤.

 

ㅤ​좀 전 춥지 않냐는 질문을 다시 해줬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답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너와의 겨울은 추운 줄도 모르고 보냈으니까. 미련 가득하다 못해 청승맞은 상념이 좀벌레처럼 뇌를 갉아먹었다.

 

ㅤ​그리워 마지않던 김정수가 지척에 있다. 대체 왜?

 

ㅤ​들고 있던 담배 한 개비가 다 타들어 가고서야 일부러 나를 찾아 왔겠구나 확신이 든다. 벼락같은 깨달음이었다. 구석진 동네의 후미진 골목. 용건이 있지 않고서야 이곳에 있을 리 없다.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3시. 다들 한창 장사하느라 바쁠 때 아니던가. 한미한 자영업자인 나와 달리.

 

ㅤ​김정수는 3년 전 서울의 대학가 상권에서 베이커리를 창업했다고 했다. 동창들을 통해 알아봐도 깜깜무소식이던 근황은 더없이 불편하던 만남에서 김정수의 입을 통해 쉽게 알 수 있었다. 재회의 날, 잠자리에 들기 전 핸드폰을 들었다. 검색 엔진에 상호명을 검색하자 지도 항목 최상단에 바로 가게 정보가 떴다.

 

ㅤ​[빵의 정수]

 

ㅤ​빵은 잘 먹는 줄만 알았지, 요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데. 참 뜬금없으면서도 김정수다웠다. 사이트가 안내하는 인스타그램 주소 링크를 누르자 김정수가 운영하는 것이 분명한 계정의 피드가 떴다. 하나하나 게시물들을 정독하다 불현듯 정신이 들어 핸드폰을 뒤집었다.

 

ㅤ​당연히 간호사가 될 줄 알았다. 언제 적 얘기냐 물으면 당연히 할 수 있는 말은 없다. 내가 알던 김정수는 열아홉에 머물러 있으니.

 

ㅤ​괜시리 목울대가 뜨거워 헛기침했다. 내가 놓친 김정수의 지난날을 확인받는 일은 내게 꽤 큰 자상을 남겼다. 이미 끝난 거다. 여태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옆자리를 허락받는 일은 없을 테니. 눈앞에서 닫힌 가능성의 문. 절망에 가까운 탈력감이 들었다. 지난 만남을 기회로 여기고 있던 내가 한심하다. 개만도 못한 새끼.

 

ㅤ​“어떻게 하면 돼?”

 

ㅤ​형편없이 잠긴 목소리는 끝이 유난히 갈라졌다. 흠뻑 젖었다 아무렇게나 마른 종이처럼 구겨지고 너덜거렸다. 서 있는 곳이 기로가 아니란 걸 알았다. 주제 파악을 마친 나와 김정수, 둘은 막다른 길에 함께였다.

 

ㅤ​대답 대신 필터를 한껏 빨아들이던 김정수의 뺨이 세로로 깊이 팬다. 한숨처럼 내뱉은 연기가 우리 둘 사이를 자욱하게 메웠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던 통조림 캔을 주워 꽁초 짓이겼다. 잘게 부스러지는 모양을 김정수는 말없이 눈꺼풀을 연신 깜빡이며 바라봤다.

 

ㅤ​유구한 버릇이다. 나는 저 속눈썹을 손끝으로 헤아렸던 적도 있다. 시선이 질척해지기 전에 눈을 감았다. 목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려 눈을 뜨자 정면에 얼굴이 보이고 굳게 닫혔던 김정수의 입이 열렸다.

 

ㅤ​스물여섯. 일찍이 부모의 둥지를 떠나 지낸 우리가 형제가 된다 한들 얼굴을 보는 건 연례행사다. 어버이날, 생신 또는 명절 정도다. 그러니...

 

ㅤ​“그때만 참자.”

ㅤ​설명은 명쾌했고 목소리만큼 또렷했다.

 

ㅤ​방법이 아닌 해법처럼. 그래서 정답처럼. 간단하기까지 했다.

 

ㅤ​“우리가 죽고 못 살던 것도 아니고.”

ㅤ​“...그래.”

ㅤ​“...밥은? 먹었어?”

ㅤ​“응.”

 

ㅤ​거짓말이지만 이젠 호흡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될 테니 죄책감 갖지 않기로 한다.

 

ㅤ​“얼굴 많이 상했다.”

 

ㅤ​위협이라도 당한 듯 순간적으로 얼굴을 물리는 내 행동과 뺨으로 다가오던 손이 동시에 멈칫하며 거둬졌다.

 

ㅤ​“미안.”

 

ㅤ​김정수는 여전히 정이 많고 착해빠졌다. 그래서 먼저 선뜻 와준 거구나. 곡기부터 끊고 뭉개고 있을 날 넌 아니까. 자괴감으로 빗장뼈가 뻐근할 정도다. 비참했다.

 

ㅤ​“가볼게.”

 

ㅤ​그 말을 끝으로 김정수를 등 지고 막다른 길에서 벗어났다. 도망쳤다는 게 올바른 표현이리라. 하지만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하지만 추격 없는 도망은 끝이 없다. 그런데 나는 무엇으로부터 도망하고 있는가.

 

ㅤ​김정수의 방문 이후로 나는 잠들지 못하게 됐다.

 

ㅤ​7월 중순의 폭염이 절정에 이른 한여름. 불침번의 교대 상대는 열대야였다.

 

 

 

ㅤ​#곽지석

 

ㅤ​종업식에 등교 전 새벽부터 리어카를 끌고 등교에 나섰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힘에 부쳐 빈 리어카를 끌어도 휘청거렸다. 본격적으로 변성기가 시작된 중학교 3학년 여름방학 직전에야 아버지의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벌써 3년째였다.

 

ㅤ​열여덟의 마지막 등교 날. 운동장에 세워둔 리어카에 전교생의 교과서를 쌓아 가까운 기원으로 향했다. 기원에 살다시피 하는 옆집 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고물상에 갈 요량이었다. 할머니는 아침에 기원 상가 건물을 청소하곤 취미로 바둑을 둔다.

 

ㅤ​할머니, 옆집 사는 장 씨 할머니는 이틀에 한 번꼴로 폐지를 주워 아버지의 업장에 가져왔다. 그때마다 제가 보이면 알사탕을 한 손 가득 쥐여 줬다. 박하, 누룽지 어쩔 땐 홍삼이다가 간혹 딸기 맛. 딸기 맛은 몇 달에 하나 있을 정도로 희귀한 물건이었다. 꼭 제가 답례처럼 할머니에게 안기는 종업식의 교과서 더미처럼. 입 안에 고이는 딸기 맛 침을 삼키며 목도리 안에 얼굴을 파묻었다. 바람이 매서웠다. 코가 닳아버릴 것 같아 무섬증이 들 정도로.

 

ㅤ​아버지는 정기적으로 소상인 우리 고물상에서는 처리가 어려운 것들을 싣고 타지역의 중상 또는 대상을 방문했다. 출장으로 집에 부재할 때면 장 씨 할머니와 라면을 끓여 먹었다. 내가 어려 유치원에 다니던 때부터 여태 그랬으니 십수 년은 훌쩍 지난 셈이다. 오늘도 아버지의 출장이었다. 라면 생각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은 학기가 끝났으니 늘 먹던 라면 대신 짜장라면을 사서 들어가야 하나 따위를 고민했다.

 

ㅤ​아버지가 어렸을 때도 이미 수십 년이 지났다던 기원이 있는 상가 건물은 이제 반백 년을 향하고 있었다. 무너지지 않은 게 용했다. 험한 외관을 올려다보며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랐다. 기원은 맨 꼭대기인 4층에 있었다.

 

ㅤ​1층은 세탁소와 떡집. 2층엔 한의원 그리고 정형외과. 3층은 마사지샵과 수학학원. 유일하게 한 층을 다 쓰는 건 기원뿐이다. 바로 반 층, 야트막한 계단만 오르면 건물 옥상이었다. 그래서 기원 문 앞엔 언제나 담배 전 내와 퀴퀴한 먼지 냄새가 났다. 꽤 걸어 기원 중앙에 들어섰다. 바깥과 별반 다르지 않은 냉기가 나를 맞이했다.

 

ㅤ​할머니.

 

ㅤ​평일 낮의 기원은 사람이 없는 게 당연했다. 정적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여느 때처럼 바둑 채널이 틀어진 TV 소리만 공명했다. 할머니. 다시 한번 발음했으나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돌연 가슴이 선득했다. 알 수 없는 예감이었다.

 

ㅤ​늘 정 씨 할머니가 혼자서 기보를 보고 있는 자리가 비어 있다. 책상 위 기보와 재떨이는 그대로인데 자리만 비었다. 가슴이 거세게 뛰었다. 책상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점차 다급해졌다.

 

ㅤ​할머니!!!

 

ㅤ​바닥에 쓰러진 할머니를 목격하자 다리가 후들거렸다. 눈을 감은 채 미동 없는 육신으로 기어가듯 다가가 숨소리를 확인했다. 살아 있다. 아직은.

 

ㅤ​생리적으로 북받친 눈물로 시야가 부옇다. 어떡하지. 어떡하면.... 생떼를 부릴 때가 아님을 이성으론 알았지만 판단이란 걸 할 수 있는 겨를이 아니었다. 눈물로 앞이 보이지 않아 재킷 소매로 눈가를 벅벅 닦아냈다. 부직포에 가까운 재질과 단추 끝이 사정없이 눈 옆을 스쳤다. 아픈 줄도 모르고 곧장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ㅤ​119죠? 할머니가, 쓰러졌어요. 네. 네. 숨은 쉬는데...

 

ㅤ​수화기 너머 구급대원의 질문에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 짜내며 겨우 답을 이어 나가던 중이었다.

 

ㅤ​아....아...으...아으....

 

ㅤ​사지를 펄떡이며 경련을 시작하는 할머니를 보자 그만 패닉이 왔다. 새하얗게 질린 노인은 뭍에 나온 물고기처럼 진동했다. 애처롭고 기괴한 장면이었다.

 

ㅤ​내 것인지 할머니의 것인지 모를 신음이 한데 엉켰다. 숨 쉬는 법을 까먹은 머저리처럼 호흡이 엉겼다. 제 손으로 목을 조르기도 했지만 더 이상 말이 나오지 않았다.

 

ㅤ​- 학생, 진정해요. 방금 구급대원들 출동했으니까 일단 시키는대로....

 

ㅤ​말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졌다. 핏발 선 눈으로 바닥을 노려보며 꺼떡하고 의식은 물론 숨까지 넘어가려던 찰나였다.

 

ㅤ​들소처럼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를 세차게 품에 안았다. 바깥의 찬 기운을 몰고 온 것과 달리 따뜻한 손으로 내 등을 문지르며 소리쳤다. 팽팽한 공기를 가르고 선명하게 들렸다.

 

ㅤ​괜찮아.... 괜찮으니까 숨 쉬어!

 

ㅤ​깊은 물 속을 허우적대다 겨우 부표를 부둥켜 안은 사람처럼 나는 그제야 간신히 정상적으로 호흡을 할 수 있었다. 교복을 입은 가슴팍이 불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걸 초조하게 지켜보던 얼굴이 잔상처럼 흘러갔다.

 

ㅤ​길게 뻗은 목과 두툼한 귓불이 전부 보일 정도로 짧은 머리카락. 유난히 숱 많고 짙은 눈썹. 나와 같은 교복. 점점 멀어지는 의식을 악착같이 붙들었지만 금세 가라앉고 만다.

 

ㅤ​나와 할머니를 살린 건 생전 처음 보는 같은 학교 남학생이었다.

 

 

 

ㅤ​#과즙상

 

ㅤ​자전거 바퀴를 도둑맞았다.

 

ㅤ​당황해 거치대에 애매하게 걸쳐진 자전거를 몇 분이나 노려봤다. 자전거도 아니고 자전거 바퀴? 심지어 두 개 전부도 아니고 달랑 하나. 그것도 뒷바퀴.

 

ㅤ​이상하다 못해 찝찝한 사건이다. 분명 밤늦게 독서실에 다녀와서 매어둘 때만 해도 멀쩡했는데 말이다. 15분이면 도착할 길을 걸어 등교하니 30분도 더 걸렸다. 지각한 탓에 이미 자습이 시작됐다.

 

ㅤ​눈을 부라리는 담임 선생님의 뜨거운 시선을 받으며 교실에 들어섰다. 최대한 비굴한 표정을 지으며 숨죽여 걸음을 옮겼다. 꼴에 고3이라고 서른 명에 가까운 인원이 하나같이 책에 코를 박고 있다. 아직 3월이니 각오가 모두 남다를 테다. 이런 걸 체감할 때면 진로가 정해져 있다는 게 다행인 건가 싶다.

 

ㅤ​마침내 자리에 앉아 사선으로 고개를 쭉 뺐다. 그토록 찾던 뒤통수가 보인다. 유난히 동그랗고 까만 머리통. 늘 그렇듯 꾸벅꾸벅 졸고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예상을 벗어났다. 문제집과 씨름 중인지 계속해서 샤프 뒷꼭지로 동그란 머리를 긁고 있다.

 

ㅤ​...이따 나도 긁어야지.

 

ㅤ​음흉한 기색의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옆자리 김상혁의 시선이 느껴졌다. 미안하다 고개를 까닥이곤 가방의 짐을 풀며 헤프게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가까스로 참았다. 어떻게 이럴까. 김정수만 보면 어릴 때보다 더 장난기가 솟는 것 같다.

 

ㅤ​3학년 새 학기를 맞이하며 김정수와 같은 반이 되었다.

 

ㅤ​너를 왜 여태 몰랐을까?

 

ㅤ​어찌할 수 없는 일을 마치 미리 알 수 있기라도 하듯 말할 때가 곧잘 있었다. 후회라고 할 순 없고 커다란 아쉬움을 담은 한탄에 가까웠다. 김정수는 그런 내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퉁명스레 대답했다. 입술이 한껏 마중 나온 채.

 

ㅤ​난 처음부터 알았어.

 

ㅤ​일 방향의 인지가 억울하다는 듯. 그래서 심통이 일고 그게 낯부끄러운 것처럼. 답지 않게 틱틱대는 김정수의 팔목을 쥐고 달랠 때면 온몸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만큼 간지러웠다. 사실 억울한 쪽은 나였다. 내가 널 일찍 알았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빨리, 그리고 더... 가까워질 수 있었을 텐데. 오래 볼 테지만 그보다 더 오래 봤을 텐데.

 

ㅤ​작년 겨울 김정수가 할머니와 나를 구조한 사건은 지역 신문에도 실릴 정도로 꽤 큰 이슈였다.

 

ㅤ​기원 아래층, 수학학원에 유난히 일찍 도착해 홀로 자습하던 김정수는 큰 소리를 듣고 기원에 올라온다. 뇌졸중이 와 큰일 날 뻔한 할머니의 병원 이송 전 응급처치를 완벽하게 해냈다. 기도를 확보하는 건 물론 신고도 빨랐다. (신고는 내가 했지만) 설상가상 충격으로 인해 제풀에 쓰러진 동학년까지도 살뜰히 보살폈다고 한다. 김정수는 개학식 학교에서 표창장까지 받았다. 의도하지 않게 유명 인사가 됐다.

 

ㅤ​곽지석은 김정수 깍듯이 형님으로 모셔라.

ㅤ​3보 이상 걸어야 할 일 있을 때마다 업고 다녀야 하는 거 아니냐?

ㅤ​업으면 3초는 버티냐?

ㅤ​애매하긴 해. 곽지석 땅으로 꺼지죠?

ㅤ​이 새끼 빠른이잖아. 그냥 김정수한테 형이라고 불러. 우리한테도!

ㅤ​나와 김정수를 전교생이 알았다. 천상 약골과 생명의 은인. 약골이라 불려 반갑진 않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첫째로 사람들의 입방에 오르는 말이 거의 사실이기 때문이고 두 번째로 다수의 시선을 받을 때면 홍시처럼 빨개지는 김정수를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ㅤ​정수, 진짜 형이라 불러줘? 정수 형?

ㅤ​아 뭘 진짜 불러!

ㅤ​언젠가의 대화를 떠올리자 또 절로 웃음이 샜다. 샤프 뒷꼭지로 뒤통수가 아니라 뺨을 찔러보고 싶다. 무르고 달콤한 주홍빛 속살이 줄줄 흘러나올 것 같다.

ㅤ​#개진상

ㅤ​동창회는 고등학교 근처 호프집에서 진행됐다. 매장을 통으로 대관했다더니 과연 참석자가 많았다. 시끄럽다 못해 귀가 먹먹할 정도의 고성이 오갔다. 불콰하게 취한 익숙한 얼굴들은 반갑기도 지겹기도 했다. 어떻게 된 게 변하는 게 없는지. 다들 똑같다.

 

ㅤ​여름의 끝자락. 높은 습도로 꿉꿉한 날씨와 달리 실내는 쾌적했다. 에어컨을 얼마나 튼 건지 서늘하기까지 한 온도에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최근 살이 많이 빠진 탓에 조금만 추워도 살갗이 오그라붙는 느낌이다.

 

ㅤ​가지 않으려고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김정수의 티끌이라도 발견할 수 있을까 해서지만. 불순하게 또는 절박한 심정이 8년이었다. 이젠 아니지만.

 

ㅤ​웬일로 늦냐며 김상혁이 전화로 성화를 부려 들린 참이었다. 모임이 시작된 지 벌써 2시간 정도 지났으니 다들 술에 절어있는 게 놀라운 광경도 아니었다. 다만 입구에서 얼어붙고 만 이유는.

 

ㅤ​김정수가 실내 한가운데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안면 근육이 마비된 사람처럼 입꼬리가 내려앉았다. 심장도 덜컹거리며 바닥을 쳤다. 반면 김정수는 술 때문인지 상기된 얼굴이었다. 터트려 맛보고 싶던 꼭 그때의 모습으로.

 

ㅤ​“어? 왔다!”

ㅤ​“곽지석!!!”

“야 곽지석 네 형님 왔어!”

 

ㅤ​못 박힌 듯 자리에 서 있자 웅성거림이 거세졌다. 호흡이 가빠지고 가슴이 거세게 두방망이질 쳤다. 참을 수 없이 구역질이 치밀었다. 입구였던 문을 출구 삼았다.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필사적으로 달렸다.

 

ㅤ​역겨운 소리를 내며 속을 게웠다. 빈속에서 나온 토사물이라고 해봤자 누런 쓴물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로 발소리가 들렸다. 보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ㅤ​“...그냥 가주라.”

 

ㅤ​고개를 숙인 채 풀썩 주저앉았다. 더러운 길바닥인 것도 잊고서.

 

ㅤ​이젠 원망스럽다. 화도 난다. 나를 말려 죽일 셈인가. 답을 돌려주지 않는 김정수를 기다리며 나는 고집스러울 정도로 땅을 바라봤다.

 

ㅤ​보고 싶어 죽을 것 같던 때가 나았다. 꿈속에선 마음껏 볼 수 있었으니까.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수백 개의 바늘을 삼킨 듯 고통스러운 존재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이 아이러니다.

 

ㅤ​“이렇게 아프면 어떡해.”

 

ㅤ​거리낄 것 없다는 듯 다가온 손이 결국 다시 나를 붙잡는다. 앞머리를 들추고 이마를 짚는 손바닥이 따뜻했다. 진을 다 빼서 흐물거리는 몸이 저절로 기운다. 술집의 기름 냄새와 미약한 술 냄새가 김정수의 체취와 함께 흘러든다.

 

ㅤ​혼곤한 정신임에도 가까이 다가온 김정수만은 선명했다. 놓치기 싫어 필사적으로 셔츠 깃을 붙들었다. 김정수가 난색을 표한다. 당황으로 깜빡이는 눈동자, 붉어진 얼굴. 눈앞의 해상도가 월등히 높아졌다.

 

ㅤ​술을 마신 건 김정수인데 내가 취하는 것 같다. 방향을 알 수 없는 억울함이 치솟는다. 내가 왜... 참아야 해. 네가 이렇게 왔는데. 우리가 먼저인데.

 

ㅤ​“너희 집 갈래.”

 

ㅤ​혹사당한 목구멍에선 고르지 못해 원색적인 유혹의 말이 튀어 나갔다. 구걸에 가까운 애원이기도 했다.

 

 

ㅤ​#개자식

 

ㅤ​엉망진창으로 벌인 동창회 날의 섹스 이후 김정수는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ㅤ​고심하다 연락한 어머니도 김정수의 행방을 모른다고 했다. 명확히 내건 거절에 나는 무력했다. 한순간에 팔다리가 잘린 사람처럼.

 

ㅤ​믿지 못해 몇 번이고 다시 찾은 김정수의 집. 베란다에서 8년 전 잃어버린 자전거 바퀴를 발견했다.

 

 

 

ㅤ​#금지선

ㅤ​사랑을 말하는 건 온전한 구를 끌로 흠집 내 떼다 바치는 것.

ㅤ​관념을 갈구하는 심정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감정을 공유할 수 있지만 조각을 나누는 건 어렵다. 혼탁한 마음을 매만져 흘려보내고 기다리는 일은 고통스럽다. 그 모든 동요가 짐 같다. 정직하나 솔직하지 못하다. 순수하게 열망하고 분노하거나 슬퍼하는 이들을 동경한다. 욕망에 솔직하고 행동하는 이들은 시기한다. 그런 스스로가 대개 비겁하고 추잡하게 느껴졌다.

ㅤ​앞선 이유로 주변인들에게 무수히 나빴다. 그건 그들의 소중함을 표현하지 않아서, 고마움을 자신만이 알고 말아서. 하지만 여전히 모든 걸 알아달라 입 밖으로 내뱉는 사람은 되고 싶지 않았다. 징징거리기 싫다. 나를 알아달라고 말하기 어렵다. 알아주지 않는 이들에게 서운함마저 내비치고 싶지 않다.

ㅤ​그리고 이젠 그런 스스로가 언짢다. 말만 하지 않는다고 해서 모르지 않는데. 간파당하고 싶지 않은 속내는 무언갈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젠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메마른 사고는 짧아진 근육 같다.

ㅤ​무더위에 밤잠을 설치는 건 예사로운 일일진대. 혼탁한 마음을 감싼 한기가 신체를 좀먹는다. 언뜻 선명하게 떠오르는 얼굴은 꿈결 같다. 차마 발음되지 못한 이름이 목구멍에 고인다. 보고 싶단 생각만으로도 죄악을 저지르는 것 같아서.

 

ㅤ​리튬 계열 폐배터리가 원인으로 추정되는 화재였다.

 

ㅤ​장례식장의 가족실에 잠을 청하려 누워있다 구부러진 등을 펴고 복도로 나왔다. 하나같이 딱한 사고라고 가슴을 치고 혀를 찼다.

 

ㅤ​아버지는 허망하게 평생을 헌신한 직장에서 불길에 타 죽었다. 새어머니가 될 예정이던 김정수의 어머니는 충격으로 자리를 보전하는 상태였다.

 

ㅤ​연락이 가닿았을까. 김정수가 사라진 지 1년쯤 되었다.

 

ㅤ​가는 빗줄기가 일순간 거세졌다. 내내 퍼부을 기세다. 창밖의 모양이 제 인생의 시점과 일치하는 것 같다. 눈 깜빡할 새 혹은 온종일 같았다. 어폐가 있지만 모든 일이 이치에 딱 맞아떨어지는 건 아니다. 그랬다면 얼마나 좋을까.

 

ㅤ​사랑하는 아버지는 이제 세상에 없다. 재고의 여지도 없는 사실이다.

 

ㅤ​뻐근한 눈가를 성마른 손길로 문질렀다. 비빌수록 간지러움이 배가 됐다. 만성 수면 부족은 발밑의 현실을 뒤늦게 느끼도록 한다. 어느 것 하나 현실 같지 않은 현실에 시달려 녹초가 됐다.

 

ㅤ​이지가 흐려진 탓에 이번에도 상상한 이미지겠거니 싶었다. 몸과 마음이 닳을 대로 닳았다. 숨이 붙어 있어 다행이다 여길 정도로.

 

ㅤ​하지만 어두운 복도 길목의 의자에 앉아 있는 건 거짓말 같은 진짜다.

 

ㅤ​“...김정수.”

 

ㅤ​평생 함께이고 싶은 사람을 곁에 두지 못하는 것, 꿈에서도 보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존재와 평생을 함께하는 것.

 

ㅤ​둘 중 무엇이 더 불행할까. 사라진 김정수의 귀환을 상상하며 매일 곱씹던 주제는 미해결의 난제였다. 그리고 원치 않는 방향으로 소거된 후자의 선택지는 나와 김정수를 평생 괴롭게 할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모든 걸 다 떠나 하나는 확실했다.

 

ㅤ​김정수가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다.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리가 어떤 관계에 놓이더라도.

 

ㅤ​“지석아.”

 

ㅤ​김정수의 부름을 총성으로 나는 달려간다.

 

ㅤ​바퀴 없는 자전거가 볼품없이 구른다. 넉넉한 품에 쓰러지듯 안긴다. 잠시 머뭇거리던 팔이 빈틈없이 빠듯하게 마주 안아준다. 나는 가능한 최대한으로 팔을 펼쳐 쇠사슬처럼 커다란 몸을 칭칭 감았다.

 

ㅤ​이제 이곳이 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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